한강의 역사(Ⅳ. 근대)

한강의 역사(Ⅳ. 근대)

출처:http://www.byounggug.co.kr

1. 제국주의의 침투와 환경

1) 열강의 침투와 한강

조선이 서구 제국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차례로 완료한 서구 제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상품시장과 식량·원료의 공급지를 찾아 동아시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아편전쟁(1840), 남경조약(1842), 페리의 일본 원정(1853), 미일화친조약 체결(1854)은 동아시아 세계를 서구 중심의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강제로 편입시킨 사건이었다.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조선 연안에도 서양 선박이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양 세력은 중국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데다가 대개는 조선이 중국의 일부라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독립적인 침탈 대상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순조∼철종년간 조선 연안에 출몰한 서양 선박들은 식수나 음식을 요구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직접 통상을 요구하는 일은 적었다. 조선 정부와 지방관리들도 통상요구는 단호히 거절하였지만, 연안에 출몰한 서양 선박을 표류민에 준해 후대함으로써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였다.조선을 독립적인 통상 대상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통상을 요구한 것은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처음이었다. 미국은 다른 열강과는 달리 조선을 청국과 분리해서 인식하였고, 그러한 태도는 후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1866년 초여름 대동강 하구에 모습을 드러낸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대동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페리가 일본을 개항시킬 때 사용했던 무력시위를 반복한 셈이지만, 결국 평양 주민과 관병들의 공격에 의해 침몰당하고 승선 인원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택한 것은 당시까지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보가 극히 불충분한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한 이후부터 서양 열강의 조선 침투는 서울과 연결되는 한강에 집중되었다.한강에 서양 선박이 처음 출현한 것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던 그 해 여름이었다. 1866년 1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병인사옥)로 베르뇌·주교 다블뤼 신부 등 프랑스인 9명과 수 천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처형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본래 흥선대원군은 국내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인 신부들을 통해 프랑스와 교섭,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구상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도 전에 국내의 반대파들에게 알려짐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을 상황에 처하게 되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탄압에 나섰던 것이다.

그 해 5월 26일 조선에서 탈출한 리델 신부를 통해 중국 천진(天津)에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해군소장에게 학살소식이 알려졌다. 로즈는 즉시 무력 보복을 결심하고 북경에 있던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와 파리의 해군성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이에 대한 보복 의무를 강조하였다. 벨로네 공사는 6월 2일 청국 총리아문의 공친왕(恭親王)에게 문서를 보내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에 선전포고하였다.

새남터순교기념성당(병인사옥 때 천주교인 사형터)

청국이거중조정 의사를 표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를 묵살하고 조선 원정의 총지휘권을 로즈 제독에게 부여하였다. 로즈 제독은 그 해 8월 10일 3척의 군함을 존선에 파견하였다.조선 연안에 도달한 3척의 함선 중 암초에 걸려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된 1척을 제외한 2척의 군함은 바로 한강 어구로 들어섰다.

이들 군함은 16일 통진부(通津府)를 거쳐 다음날 양천현 염창(鹽倉, 현 강서구 염창동)에 머물고 18일에는 하중리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이들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은 수로를 측량하여 본격적인 서울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함선들은 그들의 진격을 저지하는 조선 선박들에게 포격한 후 일단 조선 영해를 벗어났다.

로즈 제독은 한강 수로 정탐의 결과를 분석하고 대규모의 함대를 서울에 직접 파견하기보다는 강화도를 점령하여 서울을 고립시키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다음 달 6일(양력 10월 14일) 군함 7척에 600명의 해병대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강화부 갑곶진에 상륙하였고, 이틀 후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뒤이어 통진부 영종진(永宗鎭)·덕진진(德津鎭)·광성진(廣城鎭)이 차례로 프랑스군에게 넘어갔다. 프랑스군은 애초의 계획대로 한강을 봉쇄하여 서울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 측은 일부러 양화진(楊花津)에 많은 선박을 가라앉혀 프랑스군대의 서울 진공을 저지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양측의 작전 모두 장기전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적당한 보급선을 갖지 못한 프랑스군의 장기전 전략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결국 한달 여의 봉쇄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군의 기습공격으로 수 십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강화성 내의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10월 13일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조선 침공과 관련해 주목할 점의 하나는 이로부터 조선의 지리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가 서구 열강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물론 조선 내 천주교도의 구실도 컸다.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 사건과 1871년 미국의 조선 침공(신미양요) 때 서양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침략해 들어왔다. 그런 점에서 한강이 열강의 일차적 침투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세적 무기와 전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강은 천연의 해자(垓字)요 천혜의 방어선이었지만, 근대적 전술과 무기 앞에서는 오히려 유리한 군사적 침투로가 되었던 것이다.

1871년 미국의 조선 침공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격침으로부터 발단되었다. 셔먼호의 행방을 탐색하던 미국 측은 중국 당국자를 통해 그 배가 대동강에 침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북경(北京) 주재 미국대사 벌린게임은 본국에 영국·프랑스와 공동으로 조선에 원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 슈어드는 이 제안을 묵살하였다.

벌린게임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미국 아시아함대사령관 벨 제독에게 셔먼호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전함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뿐이었다. 벨 제독은 그 임무를 전함 와추세트호의 함장 슈펠트에게 맡겼다. 슈펠트는 1866년 12월 황해도 장연에 도착하여 셔먼호 생존자가 있으면 송환해 줄 것을 부탁하는 ‘정중한’ 서한을 남기고 회항하였다.

이 시점에서 조선과 미국간의 충돌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사정이 바뀐 것은 미국에 그랜트 정부가 들어선 이후였다. 새로운 정권의 피쉬 국무장관은 상해 총영사 조지 슈어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약을 체결하되, 가능한 한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이 결정을 수행하기 위해 페리의 일본 원정 방식을 채용하기로 하였고, 로저스 2세가 이끄는 아시아함대가 동원되었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조선 해안에 정박하자 조선정부에서는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3명의 관헌을 기함 콜로라도호에 파견하였다.

신미양요 초지진전투

그러나 미국 측은 이들의 지위를 문제 삼아 미국 특사와 대등한 특사의 파견, 미국 선박의 연안 측량 허용 등을 요구하였다. 다음 날부터 미국은 일방적으로 강화 해역 측량을 시작하였다. 조선군 수비대가 미 군함에 포격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다. 미국은 바로 무력 보복에 나서 광성진을 점령하고 다시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했지만, 조선 측의 상응한 회답이 없자 10여일 후 조선 해역을 떠났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은 조선 측의 격렬한 저항과 자국 내부 사정이 함께 작용하여 좌절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쟁 중에 강화해협이 봉쇄됨으로써 조운(漕運)이 두절되어 서울의 물가가 폭등하고 민심이 소란해진 것은 오히려 사소한 문제였다.

두 차례의 전쟁은 조선 후기 이래 조선 지식층 내부에 잠류하고 있던 개국론(開國論)을 일시 침묵시켰다. 양이(洋夷)에 대한 적개심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였고, 개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전향적이었던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강력한 쇄국(鎖國) 의지를 천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상황에서 당시 집권자가 자주적 개항을 서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양 세력의 침투는 또한 조선정부로 하여금 해방(海防)과 수도권 방어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조선정부는 일차적으로 강화도 군사를 증강 재편하였고, 한강 하구와 인천 주변의 군사력도 강화하였다. 군사력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세목(稅目)도 많이 만들었다.

전국 토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주된 것이었지만, 경복궁 중건을 위해 신설된 세목에서도 군비 증강에 지출된 몫이 적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무기제조 체제를 정비하고 신무기를 개발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운현궁 옆의 금위영이 무기 체계 정비와 신무기 개발의 주역을 맡았고, 병인양요 직후인 고종 4년 9월에는 서양 선박을 모방한 새 전선(戰船)을 제조하여 진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또 화포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개발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기 제조에 관련된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도 한층 심화되었고, 그런 만큼 서양 과학기술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 침입은 서양에 대한 조선사회 전반의 적개심을 고조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에 대한 구체적 지식의 필요성을 제고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것이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 개국을 단행한 내적 계기의 하나였다.1853년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하여 개항한 일본은 뒤이어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열강과 차례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이른바 ‘불평등조약 체제’에 편입되었다. 일본의 경우 이미 16세기초부터 포르투갈·네덜란드 등 서양과 접촉해 왔기 때문에 개항의 충격은 상대적으로 덜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욕적 조약을 체결한 막부(幕府)에 대한 반발은 격렬하였다.

막부에 대한 각 번(藩)의 저항은 토막전쟁(討幕戰爭)을 통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제 절대주의 국가를 수립하여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동양 3국의 초기 반응은 대체로 유사한 것이었다. 양이(洋夷)를 물리침으로써 국권=군권(君權)을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전통적·중세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던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과의 교섭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서양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서양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논리가 다른 한편에서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불평등조약 체결 직후 강렬한 배외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이 곧 서양을 모방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모색하게 된 것도 그러한 사상 동향의 귀결이었다.일본 정부 및 사회 일각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된 것은 명치유신 직후인 1860년대 말부터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명치유신으로 정체(政體)를 바꾼 일본이 보낸 국서(國書)에 과거의 상례를 벗어난 비례(非禮)의 문구가 들어있음을 들어 그 접수를 거부하였고, 그 이후에도 일본 사신의 입국을 수차 거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봉건귀족과 무사층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또 서구 열강에 앞서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한론자의 우두머리격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실각하면서 1860년대 말의 조선침략론은 일시 잠복하였다. 일본이 재차 조선 침략 구상을 수립하고 그를 실천에 옮기게 된 데에는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양해’ 또는 ‘권유’가 있었던 점과 조선 내에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면서 개국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점이 아울러 작용하였다.

1875년 초 조선이 국서 수교를 재차 거부하자 일본은 열강을 본 따 함포외교 수단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해 4월 일본은 3척의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8월에는 다시 운양호(雲揚號)를 강화해협에 보내 조선 포대에 포격을 가하고 영종도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운양호사건). 운양호가 귀환한 뒤 일본은 조선 측의 선제공격을 빌미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계획을 세웠다.

1875년 12월 일본은 육군중장 겸 참의 구로타 키요다카(黑田淸隆)를 전권변리대사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부사(副使)로 하는 30명 규모의 사절단과 800명의 혼성여단 병력을 8척의 군함과 2척의 수송선에 승선시켜 부산항에 입항시켰다. 부산항에서 한차례 무력시위를 벌인 일본 함대는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강화도에 무단 상륙한 후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1876년 1월 5일 어영대장 신헌(申櫶)을 접견대신으로 삼고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나섰다. 1월 17일부터 시작된 양측의 회담은 4차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결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은 일본을 매개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 편입되었다.

이 조약에서 규정한 조계설정권·영사재판권·무관세무역·해안측량권 등은 불평등조약의 전형적 특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일본은 자국이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세계적으로 확대되던 제국주의적 불평등조약 구조의 최말단에 자리함으로써 가장 혹심한 수탈대상으로 전락하였다.그런데 강화도조약은 개항장(=조계) 대상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조약 제5관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의 연해에서 통상에 편리한 항구 5개소를 찾은 후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 명치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 2월부터 헤아려 20개월이 되는 때로 한다’고 규정했을 뿐이다. 강화도조약 직후부터 조선 침투에 유리한 개항장을 물색하기 시작한 일본은 1878년 여름에 이르러 원산과 인천의 개항을 요구해 왔다.

조선정부는 원산은 왕조의 발상지인 함경도에 속해 있다는 점을 들어, 인천은 서울의 인후부(咽喉部)라는 이유로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으나, 결국 1879년 7월 원산 개항에, 1881년 2월 인천 개항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80년에 원산이, 1884년에는 인천이 각각 개항되었다.강화도조약과 동 조약 부록 통상장정의 체결에 따라 개항장에는 거류지 무역기구가 만들어졌다.

일본 상인들은 원칙적으로 개항장 내 일본인 거류지 사방 10리 안에서만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상인은 수입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든, 수출 상품을 매집하기 위해서든 한인(韓人) 객주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과 동시에 ‘개항장 객주’라는 새로운 존재가 출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개항은 주로 국내 유통망에 기반하여 성장해 온 기존 객주들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많은 객주들이 개항장으로 이주하여 거류지 무역에 참여하였다. 인천에서 일본인과 거래관계를 맺은 개항장 객주의 다수는 한강변에서 성장해 온 경강(京江) 객주 출신이었다. 한강변 객주들이 인천에 진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서울 곧 한강의 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전국 물화의 최종 수집지는 서울이 아니라 개항장이 되어버렸고, 물화의 유통 경로는 내륙 각지 ↔ 개항장 ↔ 일본 및 제 외국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은 개항장 무역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2) 용산 개시(開市)와 한강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현실적 대응책으로서의 부국강병정책은 1880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의 귀국을 계기로 하여 본격화되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비롯한 새로운 관서를 설치하였고, 선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시찰단(신사유람단)과 유학생(영선사)을 파견하였다.

또 기기창(機器廠)·박문국(博文局)·직조국(織造局)·잠상공사(蠶桑公司)·조지국(造紙局) 등 각종 관영 제조장을 설치하여 근대적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기틀을 다지고자 하였으며, 육영공원이나 별기군(別技軍)·우정국과 같은 신식 교육·군사·통신기관을 설치하였다. 개항 직후 정부의 개화정책은 중앙 정계 내의 혁신적 청년 관료들과 일부 재야 지식인층의 지지에 힘입어 여러 난관을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 개혁 사업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첫째는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토지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을 근본적으로 수술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관세·상업세 등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는 것만으로는 폭증하는 재정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해관세 수입은 재정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차관의 담보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용한 재원으로 활용될 수 없었다. 결국 정부가 취할 수 있었던 방법은 대민 수탈을 강화하거나 기존 관서의 재원을 신 기구에 이속하는 것 뿐이었다.

둘째는 개혁 추진 여부는 물론 그 방법과 속도를 둘러싸고 정부 관료간에 심각한 이견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이견을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 중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재야 유생과 다수의 정부 관료들이 개혁에 반대하고 있었고,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도 방법 면에서나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는 면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친정(親政)에 임한 고종이 이견을 조정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지 못했던 점도 개혁의 순조로운 진행을 방해한 주요 요인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은 이러한 상황에서 구식 군인과 서울 주변 하층민의 불만이 모아져 발발한 사건이었다. 정부는 구식 군대에 돌아가야 할 재원을 떼어 별기군에 몰아 주었을 뿐 아니라 경강변 수세를 강화하고 개항장에서 새로운 세원을 찾아내는 등 증세(增稅)에만 몰두하였다.

관료들의 부패는 민(民)의 부담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특히 개항 이후 유통경제의 확대에 따른 치부(致富) 기회의 증가도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한 측면이 있었다. 1882년 6월 구식 군인들은 요미(料米) 지급의 지연과 부정, 그리고 별기군에 비한 차별대우에 항거하여 봉기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선혜청 창고를 파괴하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의 집을 불태웠으며, 이어 궁궐로 들어가 민겸호 ·김보현(金輔鉉) 등 요직에 있던 인물들을 살해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폭동에는 왕십리·이태원 등지의 하층민들도 합세하였다.

왕십리와 이태원은 조선 후기 이래 서울에 채소를 공급하는 채소 산지였으며, 특히 이태원 주민들은 경강(京江)에 가까이 살았던 관계로 경강 상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주민의 폭동 참여는 개항 직후 정부의 개화정책 과정에서 증대된 대민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구식 군인들이 궁궐을 장악한 상황에서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서정(庶政)을 위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오군란 수습을 빌미로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그 동안의 개화정책을 전면 부인하고 구 체제로 복귀할 것을 선언하였다. 삼군부(三軍府)를 복설하고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으며, 그밖에 신식 기구들도 모두 없애 버렸다.

그 동안의 개화정책의 성과는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추진력도 일시 사라져버렸다.임오군란이 발발하자 당시 중국에 있던 어윤중(魚允中)과 김윤식(金允植)은 개화정책의 좌절을 우려하여 청국(淸國)에 개입을 요청하는 한편, 국내의 민씨 척족(戚族)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청국도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실질적 종주권으로 전환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조선의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진주한 청국 군대는 임오군란의 주모자들을 체포·처형하는 한편, 흥선대원군을 천진(天津) 보정부(保定府)로 납치해 갔다.

청국은 대규모의 군대를 서울 한복판에 주둔시킨 가운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강요·체결하였다(1882년 음력 8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불평등조약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중세적 사대(事大) 관계까지 계승한 것이었다.

이 ‘장정’은 원칙적으로 조선과 청(淸)의 특수관계에 입각한 청의 특수 이익만을 규정한 것이었지만, 제국주의적 불평등조약의 ‘최혜국조관’에 의해 청이 조선에서 획득한 권익은 일본과 서구 열강에게도 같은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열강의 조선 침투는 근대적인 성격과 중세적인 성격을 아우르면서 진행되었다.

청은 경제적 권리를 확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정 전반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띠고 조선에 들어온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의 통상사무 뿐 아니라 내정 전반에 대한 실권을 장악하였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의 결과 청국 상인은 한성과 양화진에서 상점을 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일본도 임오군란 과정에서 입은 피해를 문책하는 차원에서 제물포조약(1882)을 체결하여 1883년부터 양화진을 개방하도록 하였으며, 거류지에서의 통행거리를 100리로 확대함으로써 일본상인이 서울에 침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한강이 개방됨으로써 조선의 수도가 무방비 상태로 청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권리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서구 각국에도 부여되었다. 그런데 청국 상인들은 양화진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대부분이 서울 도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초대 상무위원(商務委員) 진수당(陳樹棠)이 남별궁(南別宮, 현재의 소공동 원구단 자리)에,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가 전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현 롯데호텔 자리)에 각각 자리잡았다.

청국 군대 역시 그 주변에 주둔했기 때문에, 청국 상인들도 용달업무를 빙자하여 도성 한복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1884년에는 현재의 회현동(會賢洞)에 중화회관(中華會館)이라는 청상(淸商)만의 상업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1885년경에는 성 내에만 300여호의 청상들이 모여 살 정도가 되었다.

한편 청국은 일본이 조선에서 독점적 세력을 확보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과 열강의 통상관계 확대를 권유하였고, 개화정책을 지속할 의지를 갖고 있던 조선 정부로서도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서구인들도 하나 둘씩 서울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882년부터는 일본 상인들도 공사관 용달을 빌미로 서울에 자리잡기 시작하여 급속히 상권을 확대해 갔다. 서울이 개시장(開市場)이 됨으로써 한강의 역할은 한층 증대되었다. 경강 상업은 바로 외국 무역과 연계되었고, 경강 상인 중에는 외국 물화를 취급하면서 부를 크게 축적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한강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수로로서의 의미도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한강의 선운업(船運業)도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한강은 조선초기부터 서울과 지방을 잇는 가장 유력한 교통로였지만, 서울 개시 이후 서울과 지방, 서울과 외국간 연계가 확대됨에 따라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다.

서울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외국 상인들에게도 한강을 이용한 수운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청상(淸商)들이 서울에 자리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인간을 연계하는 기선회사(汽船會社)와 마차회사(馬車會社)를 설립한 것도 서울로 반입되거나 서울에서 반출한느 물품의 유통속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운항 속도를 높이고 화물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기선(汽船)을 도입해야 하였고, 거기에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아직 취약한 조선인의 자본축적 상태에서 당연히 그 몫은 국가 또는 회사에 돌아가야 하였다. 1884년에 정부는 미국 상인과 합작으로 기선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같은 해 김정구(金鼎九)·강기환(姜基桓)·김기두(金箕斗) 등이 영국인과 합작하여 윤선상회사(輪船商會社)를 설립하였지만 정작 배는 구입하지 못하였다. 한강 수운을 목적으로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민간회사가 출현한 것은 1885년의 일로 경강상인들이 대흥회사(大興會社)를 설립하여 미국 기선 대등리호(大登利號)를 구입하여 마포와 국내 각 포구를 연결하는 연안 운송업을 개시했던 것이다.

1888년에는 조희연(趙羲淵)이 삼산회사(三山會社)를 설립하고 용산호(16t)·삼호호(13t) 2척의 기선을 구입하여 마포∼인천간 항로에 투입하였다. 기선에 의해 한강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연안항로가 개척된 것은 이운사(利運社)가 설립되면서부터였다.

1886년부터 해운사무를 전담하게 된 전운국(轉運局)은 이 해 해룡호(海龍號), 다음해 광제호(廣濟號), 1892년에 현익호(顯益號) 등 200∼500톤 규모의 기선을 차례로 구입하여 세곡(歲穀) 운송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박은 세곡 운송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1년의 절반 가까운 기간 동안 운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세곡 운송에 참여하여 부를 축적해 왔던 민간 상인·선운업자들은 오히려 일거리를 잃는 모순된 상황이 빚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독상판형(官督商辦型) 회사로 설립된 것이 바로 이운사였다. 이운사는 민영준(閔泳駿)과 전운국 총무관 정병하(鄭秉夏), 인천항 경찰관 우경선(禹慶善) 등의 발의에 의해 전운국이 청국에서 도입한 20만량의 차관으로 1892년 12월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청의 초상국(招商局)을 모방한 관독상판형 회사로서 세곡 운송을 목적으로 하되 일반 화물과 여객 수송도 병행하였다. 이운사는 설립과 동시에 전운국이 직영하던 해운 업무를 기선과 함께 인계받아 조운(漕運)에 투입하는 한편, 따로 독일에서 기선 조주부호(潮州府號)를 구입하고 상해 조선소에서 한양호(漢陽號)를 건조하여 보유 기선 수를 늘렸다. 또 일본에서 30톤급의 소형 선박 경운호(慶運號)·광리호(廣利號)·광제호(廣濟號)·전운호(轉運號)와 그밖에 풍범선(風帆船) 15척을 구입하여 연안과 한강을 잇는 세곡 운송에 투입하였다.

기선 외에 범선을 이용한 한강 수운도 크게 발전하였다. 개항장의 거류지 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전국 물화의 집산지로서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서울은 여전히 전국 최대의 도시였고, 궁가(宮家)와 관부(官府)가 몰려 있는 최대의 소비지였다. 특히 서울 개시 이후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서울과 지방의 물화 교류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세곡선 운반을 주로 하던 이운사나 민간 회사 소유 기선만으로는 이러한 수송량의 확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범선의 이용도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제 개량 범선을 수입하는 등 범선 이용도 확대 일로에 있었다. 1887년에는 경강상인들이 따로 선상회사(船商會社)를 설립하여 풍범선을 구입하여 강운에 투입하였고, 지방에서도 개량된 풍범선을 새로 구입하여 연안 항운에 종사하는 예가 늘어났다.외국인 소유 기선의 한강 운항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1883년경 청국 상인들이 진수당(陳樹棠)의 협조를 얻어 기선회사와 마차회사를 설립, 경인간 수송에 나선 것을 필두로 하여 1889년부터는 서구 상사가 한강 수운 및 연안 항로에 기선을 투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독일계 세창양행(世昌洋行), 미국인의 타운선양행(他雲仙洋行), 중국인 동순태(同順泰) 등이 모두 독자적인 한강 수운업을 경영하였다. 한강을 왕래하는 기선과 범선이 모두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단속하고 수세(收稅)하기 위해 선상회사(船商會社)·상선회사(商船會社) 등의 수세도고회사(收稅都賈會社)들도 설립되었다.

마포에는 세관이 설치되어 인천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는 화물에 과세하였다. 청국 역시 1892년 마포에 경사국(警査局)을 설치하여 자국 선박의 불법행위를 단속하였다. 한강의 경제적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한강 도강(渡江) 인구도 늘어났다. 1902년에는 한강변의 나룻배를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도선(渡船) 운임을 통일할 목적으로 도진회사(渡津會社)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서울 개시 이후 한강철교가 완공될 때까지, 한강 수운은 그 절정기를 맞은 셈이다. 한강이 비록 제국주의 세력의 교통로로 기능하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조선 상인들도 선운업을 통한 발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한강은 서울에 위협과 기회를 함께 제공하는 요소였다.(history.seoul.go.kr에서 발췌)

3) 철도 부설과 한강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외세의 직접 개입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조치로 단행된 대 중국 사대관계의 단절, 신분제 폐지, 조세 금납화 등의 조치는 조선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조선 지배 요구를 수용하는 개혁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일본 화폐의 통용 허용 등의 예속적 조치와 맞물리면서 일본 자본의 조선 침투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일본의 야만성을 드러낸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갑오 개화파 정권의 대일 예속성을 여지없이 폭로한 사건이었다.

마침내 그 해 겨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함으로써 갑오정권은 붕괴되었고, 고종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권이 구성되었다.새 정권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패배와 갑오개혁의 실패라는 두가지 좌절 위에 세워진 정부였다. 국내적으로 정권을 지탱해 줄만한 결집된 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정권을 위협할만한 강력한 저항세력도 없었다.

한동안 개화파 인사들로 조직된 독립협회가 정권의 유력한 견제세력으로 존재했지만, 그조차도 서구 열강의 힘에 기댄 존재였고,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국외적으로는 끝없이 제국주의적 이권을 요구해 오는 열강에 둘러싸인 정권이었지만, 삼국간섭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에 불안한 세력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그 사이에서 생존을 유지해갈 수는 있었다.

국내에 유력한 견제세력이 소멸됨으로써 정부의 근대화 정책은 특별한 장애 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열강에 이권을 나누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897년 초까지 광산과 철도·삼림채벌권 등이 러시아·일본·미국·프랑스 등에 할애되었다.

이권 분배가 설사 조선에 대한 열강의 관심을 지속시켜 세력균형을 유도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할지라도, 이로써 국가 경제의 주요 명맥이 외국 자본에 장악되는 심각한 결과가 빚어졌다. 열강에 대한 이권 분배가 중단되고, 나아가 이권 분배 자체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 나온 것은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된 이후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의 외형과 내실을 갖추기 위해 열성적으로 근대적 문물을 도입하였다. 철도와 전차의 부설, 전등·전화의 가설, 근대적 기업의 설립, 근대적 교육기관의 확충, 수도 서울을 근대 도시화하기 위한 도시개조 등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사업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급속히 추진되었다.

특히 대한제국기의 근대화정책은 이전 시기의 그것과는 달리 재정 문제에 대한 고려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은 전국의 토지를 상세히 파악하고 지세(地稅)의 탈루를 막음으로써 안정적인 세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이들 개혁사업이 대개 중도에 그치거나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대한제국기는 대단히 역동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고, 수도 서울과 한강은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대한제국기 한강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철도 부설과 서울 도시개조사업이었다.

철도에 관한 인식은 이미 개항 직후부터 싹트고 있었지만, 그 무렵 정부가 막대한 자본과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요하는 철도사업에 착수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가 철도 부설에 전향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이후였다. 한편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후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그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조선 식민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던 일본의 경우 이미 1880년대부터 경부철도 부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철도시발지(노량진역)

철도의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 제고와 열강의 제국주의적 요구가 맞물리면서 1896년 3월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인 모스(Morse)에게 부여되었다. 모스는 다음 해 3월 인천 우각리(牛角里)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철도 부설공사를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집요한 철도 부설권 요구를 물리치고 모스에게 부설권을 준 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견제하게 하려는 고육책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이후에도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결성하는 등 경인철도 부설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모스도 결국 1897년 12월 자금 부족을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부설권을 양도하였다.

일본인들은 경인철도인수조합을 모태로 경인철도합자회사를 결성하고 공사를 강행하여 1899년 9월 18일에 제물포∼노량진간의 철도를 완공하였다. 한강철교 공사는 애초 모스가 착공했지만 교각 3개와 교대(橋臺)만을 만들어 놓고 일본에 양도함으로써 이후 공사는 경인철도합자회사에서 계속하여 1900년 7월 5일에 준공하였다.

경인철도 한강 교량의 준공으로 인해 한강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한강 교량 건설 자체가 장안의 화제가 되어 공사 중에는 한강변에 쌓인 수많은 목재·철강과 일하는 인부들이 구경거리가 되었고, 공사가 완공된 후에는 웅장한 철교가 새로운 경관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큰 변화는 수상교통로로서의 한강의 지위가 떨어지고 육상교통이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수 백년간 서울과 전국을 잇는 간선 교통망의 중심에 있던 한강은 교통로로서보다는 장애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수상운송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던 전국적 유통망도 철도를 이용한 육상운송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경부·경의철도가 부설되기까지 육상운송은 서울∼인천간의 제한적인 노선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철도는 전국적 차원에서 유통경제를 재편하는 지렛대가 되었다.

대한제국기 정부 주도의 도시개조사업이 진행되면서 한강변 용산에는 전환국 공장, 군부 피복제조소와 총기제조소, 궁내부 정미소, 잠사장 등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국영 제조장이 들어섰다. 용산이 서울 외곽의 새로운 산업지구가 된 것이다. 이로써 한강과 용산은 근대도시 서울의 발전상을 표현하는 대표적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는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적극적인 보호국화 정책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좌절하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 발발 직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이 임의로 행동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자의로 수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통 당시 한강철교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11월 ‘제1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어 시정 개선을 빌미로 내정 전반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 나갔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반일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고종을 퇴위시킨 후 ‘제2차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내정 전반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 기간 중 한국 내의 인력과 물력을 마구잡이로 수탈하여 경부·경의철도의 속성공사에 나섰고, 공사는 기록적인 속도로 진척되어 1905년에는 두 철도 모두 개통을 보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한강철교의 활용도는 한층 높아졌고, 철도가 미치는 영향력도 크게 강화되었다.한강에 철교가 놓이고 철도망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는데 반하여 선박을 이용한 운송업은 활기를 잃어갔다.

경부·경의철도 부설 이후에도 한동안 한강을 무대로 하는 운송업은 지속되었지만, 점차 철도 운송을 보조하는 예속적 지위로 전락해 갔다.1906년 이완용(李完用) 등 친일파 관료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용산의 열항회사(洌港會社)는 기선 한강환(漢江丸)을 용산∼양근과 용산∼강화간의 정기항로에 투입하여 승객과 화물을 운송하였다.

또 같은 해에는 경강객주 여삼현(呂三鉉) 등이 소기선 3척을 구입하여 동제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참령(參領) 이기홍(李起泓) 등이 자본금 2만원으로 한강 상하류의 강운(江運)을 개척하기 위해 예선회사(曳船會社) 설립을 추진하였지만 모두 좌절된 듯 하다.

이밖에도 한강 강운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로는 1908년 김화준(金華駿)·이석종(李奭鍾) 등이 자본금 8,000원으로 설립한 연강목선운수합명회사(沿江木船運輸合名會社)와 1910년 유성준(兪星濬)·안영수(安暎洙) 등 퇴직 관리와 일본인 미우라(三浦乙郞)가 합자하여 송파시장에 설립한 송파운수회사(松坡運輸會社)가 있었다.

한강을 무대로 하여 설립된 이들 회사는 대개 한강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선업(渡船業)이나 한강 상류의 목재를 운송하기 위한 소규모 운수회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강 강운이 쇠퇴함에 따라 한강변 각 포구에서 성장해 왔던 경강객주들도 위기에 직면하였다. 서울로 들어오는 화물의 집산지는 이제 더 이상 경강 포구가 아니었다.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서울역) 주변이 새로운 화물의 집산지로 급부상하였다. 더불어 남대문로 일대를 장악한 일본인들이 모든 화물의 배급권을 쥐게 되었다. 한인 객주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객주들을 연계하는 운송회사를 다투어 설립했지만, 통감부 시기의 회사 설립 제한, 나아가 1911년 <조선회사령> 공포로 인해 이들 회사는 소멸하고 말았다.

이후 객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철도 운송에 부수되는 소운송업에 진출하는 길밖에 없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의 철도역 주변에는 철도 화물 운송업을 취급하는 소운송업체가 수 없이 만들어졌다. 이들 소운송업체는 통감부와 총독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했고, 그 때문에 대개는 일본인에게 사업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그런 점에서 한강의 쇠락은 곧 한국 상인들의 쇠락이었으며, 철도 운송의 발전은 일본 상인들의 발전이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를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력한 물리적 기반이 된 것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군대였다.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규모로 진주한 일본 군대는 전쟁 이후에도 조선을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도 서울을 위협하는 한강변 용산에 영구적인 근거를 마련하였다.

일본은 군용지 수용이라는 명목으로 이태원과 용산 주변 300만평의 광대한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 땅 대부분에 일본군 사단 병력이 상시 주둔할 수 있는 병영이 건설되었고, 나머지 땅에는 철도 공작창을 비롯한 철도 관사들과 일본 조달상인의 상가와 주택이 들어섰다. 조선 초기부터 도성에 들어오는 조세곡과 군량미의 집산지였고, 대한제국기에는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서 자주적 근대화 작업의 표상처럼 되어 있던 용산은 거꾸로 한국인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용산 일대는 일본 군대와 조달상인 철도 직원들의 근거지가 되면서 도성 안 진고개 일대(남촌)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일본색이 짙은 지역으로 바뀌었다.

2. 일제강점기의 한강

1) 교량건설

군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후 한동안 유럽산 직물류를 수출하고 금이나 미두류(米豆類)를 수입해 갔지만,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산 면직물을 대한(對韓) 수출품의 주종으로 삼았다. 아울러 일본 국내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업 인구가 감소하고 쌀 부족 현상이 일상화됨으로써 식량 공급지로서 조선의 위치는 그만큼 부각되었다.

조선과 일본간에 전형적 식민지 교역관계로서의 이른바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가 성립된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각 포구와 내륙시장의 연계, 중앙과 지방의 연계가 파괴되고 주요 항구가 바로 일본 각 항구와 연계되는 유통망이 마련되었다. 인천·부산·원산·목포·군산·진남포 등 개항장이었던 주요 항구는 일본 물화의 수입 통로이자 조선 물산의 수출 통로로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한국 내의 자립적 유통구조가 파괴되고 일본 경제에 종속되는 유통구조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시장의 자립성은 여지없이 붕괴되었고,서울은 경성부(京城府)가 되는 순간부터 전국 규모의 유통경제를 조율하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어 버렸다.

경성역은 경의·경부철도의 통과점에 불과하였으며, 서울 거주 인구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물자의 수입 통로에 불과하였다. 한강 역시 인천과 서울을 매개하는 부분적 유통로로서의 지위만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서울은 여전히 전국 최대의 도시였고, 수십만 경성 인구가 소비하는 물화의 상당 부분이 한강을 거쳐야 했지만, 이제 한강은 더 이상 서울이 존립하는데 사활적 의미를 지닌 유통로는 아니었다.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한강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유통로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내내 한강 수운은 발전하기보다는 퇴보하였고, 한강변 주민 역시 성장하기보다는 몰락하였다.일제는 식민지 조선 경제를 일본 경제와 직결시키고, 나아가 대륙을 침략해 들어가는 데 필요한 철도와 간선 도로망을 확충하고 정비하는 데에는 열심이었으나 한강 수로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에는 무관심하였다.

천혜의 수로였던 한강은 일제강점기 내내 교통로로서는 방치된 채로 남아 있었다. 새우젓이나 굴비·북어와 같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수요가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마포나루에는 새우젓배가 끊임없이 드나들었지만, 한강변 나루터의 옛 성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포구는 거의 남지 않았다.

충청도·경기도 연안지방의 특산물을 받아들이던 마포, 강 상류 일대에서 채벌한 시탄(柴炭)이 모이던 뚝섬나루 등을 제외하고는 포구 상업은 사실상 소멸되어 버렸다. 이제 한강은 교통로로서보다는 장애물로서의 의미가 더 크게 되었다. 영등포 일대에 중소 규모의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한강의 장애는 더 크게 부각되었다.

영등포에는 조선피혁주식회사 영등포 공장을 필두로 하여 중소 규모의 연와(煉瓦)·토관(土管) 공장이 다수 들어서서 서울 외곽의 산업기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 한강 남쪽의 너른 들은 일찍부터 과수원·채소밭으로서 서울 주민에게 필수적인 식료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한강 남쪽에서 생산되는 물자는 대개 나룻배를 통해 서울로 반입되었지만, 1912년 무렵 자동차 운송이 시작되었다.

한반도에 트럭을 이용한 화물 운송이 시작된 것은 1913년부터였다. 이제 자동차나 수레를 통해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교량의 건설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마포에 잔교(棧橋)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일도 있었으나, 이러한 부교(浮橋)는 그 비용이나 공역에 비해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영구적 교량 건설이 불가피하였다.

한강인도교 공사는 1916년 4월 교각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1917년 10월에 완료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인도교는 구(舊) 철교를 개축할 때 철거했던 낡은 자재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중앙 차도의 폭 4.5m, 좌우 보도의 폭이 1.6m에 불과한 좁은 다리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 남북안을 왕래하는 차량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보행용으로는 큰 불편이 없었지만, 193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공업화정책을 강행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영등포 일대가 군수산업단지로 부상하였고, 노량진이 영등포와 서울을 잇는 거점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대개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노량진과 영등포·마포·청량리 등 서울과 외곽을 잇는 지점의 도로가 크게 확장되었고, 차량의 왕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대량 수송을 위한 트럭 운송이 확대되었다.

서울 도심에서는 차량 운행을 위해 청계천 복개가 논의될 정도였다. 이에 한강인도교의 확장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4년 8월에 새로운 한강인도교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3일에 완공하였다. 새로 완공된 한강인도교는 처음부터 차량 통행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005m, 폭 19m 97.8cm였다. 한강인도교는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상시적 시설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지만, 시대의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또 다른 의미에서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강인도교 곳곳에는 “잠깐, 한번 더 생각하시오”라는 문구가 쓰인 팻말이 걸렸다. 극심한 생활난과 차별·억압 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한강인도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강인도교 신교량의 착공과 때를 같이 하여 동부 한강에도 다리가 만들어졌다. 광나루에서 강남으로 도강하는 광진교(廣津橋)가 그것이다.

광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의 대표적인 나루터였고, 조선 초기에는 이곳에 부교(浮橋)가 놓이기도 하였다. 광나루 주변은 또한 서울 주민의 식용으로 공급되는 채소류와 과실류의 산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나루는 일제강점기에도 강남북을 오가는 인원이 특히 많았던 나루였고, 강 모래밭이 넓게 발달되어 있어 유원지로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일본이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부각된 강원도와 충북 일대의 광물 자원이 서울로 들어오는 통로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광나루에서 강남으로 이어지는 광진교 공사는 한강인도교 신교량과 동시에 진척되어 1934년 8월에 착공, 1936년 10월에 준공되었던 것이다. 2개의 교량을 동시에 건설함으로써 작업효율을 높이겠다는 것이 일제 당국의 의도였다. 광진교의 길이는 1,037m, 폭은 9m 90cm였다.

2) 을축년 대홍수와 한강 개수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조선 내 교통망을 확충·편제하였으므로 조선시대 이래 자생적으로 발전해 왔던 유통경로는 방치되거나 폐기되었다. 한강 수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래 한강 수로와 나루터를 정비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5년 여름의 전무후무한 대홍수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한강에 대한 이전까지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의 3일간, 뒤이어 같은 달 15일 밤부터 19일까지 5일간, 서울 일원에는 두 차례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이 기간의 강수량은 무려 753㎜에 달하였다. 이렇다할 수해 방지시설이나 대책이 없던 시절이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 때의 홍수로 현재의 이촌동·뚝섬·잠실·신천·풍납동 지역 대부분의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수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송파장도 자갈밭으로 변하였다. 뚝섬 부근은 한강 수로 자체가 바뀌어 육지가 물길이 되고 물길이 육지로 되는 대변화가 일어났다. 용산·마포·영등포 등은 도심부에 가까운 인구 밀집지역이었던 관계로 주택 침수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였다.

한강과 멀리 떨어진 도심부에도 안국동·인사동·관훈동 등 북촌(北村) 일대의 가옥 수 백채가 물에 잠겼다. 뚝섬수원지가 물에 잠기고 주변 강물이 넘쳐 6km 밖의 청량리 일대도 침수되었다. 조선인 피해에 대해서는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조선총독부의 집계에 따르더라도 홍수로 인한 피해는 익사자 404명, 피해액 4,625만원에 달하였다. 당시 각 경찰서에서 조사한 수해상황은 <표1>과 같다.

서울지역 각 경찰서에서 조사한 1925년 7월 수해상황

<표1>

구분

가옥

이재민

인명피해

침수

유실

전파

난파

서대문서

1,200

 

26

1

1,537

사망109/행불10

용산서

8,792

862

81

642

32,500

익사11/행불3

동대문서

1,917

731

1,351

 

사망65

영등포

1,898

302

276

155

5,250

익사4

여의도

 

43

21

7

 

 

자료 : 박철하, <1925년 서울지역 수해 이재민 구제활동과 수해대책>, ≪서울학연구≫13, 1999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조선인이 입은 피해는 사회단체·언론사 등의 수해 구제활동을 통해 극히 일부가 보상되는 정도였다. 다만 일찍부터 일본의 군사시설과 철도시설이 자리잡고 있던 용산 일원도 피해를 면하지 못했던 점에서는 조선총독부도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로서도 한강의 홍수에 대비한 종합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홍수 다음 해인 1926년부터 본격적인 한강개수계획이 수립·추진되었다.물론 그 이전에도 홍수에 대비하여 한강을 부분적으로 개수한 사례는 있었다. 1910년대에는 이촌동·여의도·불의도(弗衣島)·노량진·영등포 등지에 제방을 수축하였고, 서울∼인천간 운하개착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 군대와 철도관사, 조달상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용산 방면에는 수해예방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욱천(旭川, 만초천) 제방축조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때 만들어진 제방조차 을축년 대홍수로 완전히 붕괴됨으로써 좀 더 종합적이고 전면적인 개수사업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일제의 한강개수계획은 일차적으로 을축년 대홍수와 같은 홍수 피해를 예방하는 데 주안을 둔 것이었지만, 동시에 향후 예상되는 교통수요의 증가에 대비하여 한강 수로의 활용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나아가 여기에는 한강변 농촌지대의 수리(水利)를 개선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키겠다는 복안도 깔려 있었다.

한강개수계획은 다음의 다섯 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첫째 양수리부터 임진강 합류점에 이르는 구간의 강폭 확장, 둘째 뚝섬 부근에서 김포 부근까지 하상(河床)의 토석 굴착, 세째 뚝섬·용산·마포·영등포 부근과 강변의 평야지대에 방수제(防水堤) 축조, 네째 송파 부근 호안의 복구·신설과 수리공사, 다섯째 안양천을 비롯한 한강 지천 수로의 직선화 등이다.

이들 사업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9년간 980만원의 예산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한강개수사업은 하상의 평준화, 수로의 확폭과 직선화, 제방 설치를 통한 범람 방지와 신규 택지와 경지 확보를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에 따라 뚝섬과 장안평지구, 신구(新舊) 용산지구, 마포지구, 영등포지구, 양동(陽東)지구, 양천(陽川)지구, 부평(富平)지구, 김포(金浦)지구의 8개 지구를 구분하여 구체적인 시행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980만원의 예산으로 예정된 모든 사업을 수행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소요하는 하상 준설과 수로 직선화 작업은 시늉에 그쳤고, 실제 사업은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일부 강안에 호안공사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뚝섬과 장안평 일대에는 총 연장 5,710m의 제방을 축조하되 이 중 2,778m에는 호안공사를 병행하였다.

마포 부근에는 한강으로 직류(直流)시킬 수 있는 암거형(暗渠型) 하천을 새로 만들고 유수지를 설치하였다. 또 영등포 지역에는 한강 좌안의 4,668km, 안양천 하구에서 도림동에 이르는 4,950m의 제방을 축조하였다. 그밖에 양동·양천·부평·김포 지역에서는 농장 방수공사의 일환으로 제방이 축조되었다. 다만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용산 일대의 공사는 비교적 충실히 진행되었다.

용산 지역에는 침수방지를 위해 제방을 확장하거나 신축하고 수문을 설치하였으며, 유수지와 배수펌프를 만들어 배수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강개수사업을 통해 한강의 홍수 위험은 지역에 따라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이는 재원 분배의 차별성, 사업의 단기성과 졸속성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3) 한강변 시설과 시민 생활

서울에 근대적 수도(水道)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남산 기슭의 일본인 거류지에서였다. 이보다 앞서 1903년 한성전기회사의 콜브란·보스트윅이 서울 시내 상수도사업에 관한 특허를 받은 바 있었다. 이들은 1905년 8월 그 특허권을 영국인들의 한국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 양도해 버렸다. 한국수도회사는 1906년 8월 1일에 상수도 공사에 착수, 1908년 8월에 준공하여 급수를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일본인들이 남산에 소규모 상수도를 부설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일본인들이 만든 상수도는 남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받아 간단한 침전·여과과정을 거친 뒤 작은 급수관으로 남촌 일대에 공급하는 극히 작은 규모의 것으로서 일본 거류민 전체에 공급하기도 부족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상수도는 역시 한국수도회사가 1908년에 부설한 상수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서울 상수도공사는 1906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1908년 8월에 준공되었다.

이 상수도는 한강에서 취수하여 뚝섬수원지에서 침전·여과·정수과정을 거친 후 20인치 짜리 동관으로 대현산배수지까지 송수·양수하여 여기에서 서울 일대와 용산에 급수하는 체계였다. 이 때 뚝섬에 만들어진 정수장은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 상수도원이었고, 한강은 이제 서울 시민의 안정적인 상수원으로서도 구실하게 되었다.

상수도 부설 초기에는 공용 급수전이 있어서 물장수들이 이곳에서 물을 받아 가가호호에 공급했지만, 점차 급수전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일반 시민들이 돈을 내고 급수전에서 물을 받아가거나 또는 자기 집에 급수전을 설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물장수는 사라져갔다.

한편 일제는 중요한 사회기반시설인 상수도가 외국인 소유로 있어서는 곤란한 점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11년 1월 일본인 재벌 시부자와(澁澤榮一)로 하여금 서울 수도를 매수하게 하였고, 석달 후 다시 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하였다. 서울 인구가 늘어나고 위생관념이 확대됨에 따라 상수도의 수요는 계속 늘어갔고, 그런 만큼 수도 시설의 확대가 불가피하였다.

뚝섬수원지에 이어 1910년대에 노량진수원지가 새로 만들어졌다. 일제가 노량진에 수원지를 신설한 것은 일본인 인구가 많았던 용산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노량진수원지의 급수량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에 걸친 확장공사를 통해 2배로 늘어났다. 뚝섬수원지 확장공사는 1928년부터 1931년까지 4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1936년에는 새로 구의수원지 신설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제1차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뚝섬수원지

구의수원지는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확장되었다. 일제 말기까지 서울의 상수도는 이처럼 한강변 뚝섬·노량진·구의의 3개 수원지에서 공급되었다. 노량진수원지에서 정수한 물은 용산 일대의 표고 35m 이상 지대에 공급되었고, 뚝섬수원지에서 정수한 물은 용산 이북 전부와 용산 방면 표고 35m 이하의 지대에 공급되었다.

그러나 한강변 수원지 시설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서울 시내 상수도 급수율은 무척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수도 시설은 사실상 소수의 일본인만을 위한 시설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현재 수도 보급률은 호수 대비 55%, 인구 대비 53%였는데, 이는 그나마 급수계획구역 내의 인구와 호수에 대한 비율일 뿐 시내 총인구에 대한 급수율은 아니었다. 또 상수도 급수율은 민족별로도 심각한 편차를 보였다. 1925년 당시 한국인 급수호수는 29.0%, 일본인 89.9%, 외국인 99.9%였다.

양화도 외인묘지

상수도와 함께 서울 시민의 일상을 지원하는 주요 시설인 발전소도 한강변에 들어섰다. 서울의 전기 공급과 전차 운영을 독점하고 있던 경성전기회사는 처음에 대한제국시기 한성전기회사가 건설한 동대문과 마포의 발전소 시설을 이용했다. 그러나 서울의 전차와 전등 이용인구가 늘고 더불어 전기를 동력으로 이용하는 사업체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발전소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전기회사는 1919년 한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사정으로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 경성전기회사가 한강변 당인리에 대규모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였다. 당인리발전소 공사는 1934년에 완공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어 완공되자마자 한강변의 새로운 명물로 떠올랐다. 당인리발전소 건너편 여의도에는 1916년에 활주로와 격납고만을 갖춘 간이비행장이 만들어졌고, 1927년에는 근대적 비행장으로 재정비되었다.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1922년 10월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대회가 열려 장안의 일대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가끔씩 곡예비행이 열렸고, 그를 구경하는 ‘여의비기(汝矣飛機)’는 그 전의 마포8경에 덧붙여 마포9경(麻浦九景)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일제강점기에 들어와 한강변의 풍치는 예전과 크게 달라졌지만, 한강은 여전히 강변 주민들뿐 아니라 서울 시민 전체의 생업과 여가공간으로 존재하였다.

여름철에는 한강인도교 밑 백사장과 뚝섬 광나루의 넓은 모래밭이 시민들의 피서지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서울 한복판에는 한강을 왕래하는 유람택시까지 등장하였다. 젊은 부호와 장안의 이름난 기생이 함께 유람택시를 타고 한강변으로 드라이브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근대적 스포츠가 차례차례 도입되면서 여름 스포츠로 수영이 각광을 받았고, 한강에서는 수영 연습을 하는 젊은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1934년에는 한강인도교 동쪽에 야외 수영장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피서 인파가 몰리면서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나 1920년에는 한강 교량 부근에 파출소가 신설되었다. 1924년에는 뚝섬에 경마장이 만들어졌고, 겨울철이면 한강인도교 밑에서는 스케이트를 타는 인파가 몰렸고, 1924년부터는 전조선빙상경기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하였다.

한강에서의 얼음 채취

전통적인 한강변의 생업도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한강변에는 어부들도 많았고, 겨울철이면 얼음낚시를 하는 강태공들이 곳곳에 구멍을 뚫어 놓고 고기와 세월을 낚았다. 기업화한 얼음 채취업도 여전히 한강을 주무대로 삼았다. 한강인도교와 광진교가 놓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뚝섬나루 등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한강변 나루터가 예전과 같은 성세를 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뱃사공은 하루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history.seoul.go.kr에서 발췌)

by 약초마을 | 2009/02/27 17:23 | 기타자료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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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중형디젤기관차 at 2014/12/20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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