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어제와 오늘

 

한강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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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이름은 본래 우리 말의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었다. ‘한’은 크다·넓다·가득하다·바르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이다. 한강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중국의 한(漢)·위(魏)나라에서는 ‘대수(帶水)’라 하였는데, 이는 한강의 모습이 한반도의 허리에 띠를 두른 것과 같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백제에서는 ‘욱리하(郁里河)’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하였으며, 고려 때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흘러내리는 강이라는 뜻으로 ‘열수(洌水)’라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켜 ‘경강(京江)' 이라 불렀다.한강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가 동진(東晋) 등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한자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후에 ‘한수(漢水)’‘한강(漢江)’으로 표기하였고, 점차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한강·한강수(漢江水) 등으로 불리어졌다.

한강(인공위성 우리별 3호 촬영(2000.1.23)

한강은 대한민국의 중부 지역을 동에서 서로 유유히 흐른다. 따라서 한강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의 동해안과 서해안의 동·서 문화를 하나로 잇는 동맥이 되었다. 즉 함경도의 분수령과 강원도의 진부령·미시령·한계령·구룡령·대관령·두문령,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죽령·조령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따라 관동·영동의 문화가 서울의 문화를 접하였던 것이다.

한강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진 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을 나누는 선이 된다. 따라서 이 커다란 세 산줄기에 에워싸여 그 사이에 흐르는 크고 작은 물줄기에 의해 이루어진 한강 유역은, 예로부터 민족문화 형성의 중심무대가 되었다.인류의 정착생활을 통한 문화의 창조는 먼저 토지와 수리(水利) 이용을 통한 식량 생산이 가능할 때 이루어진다.

아울러 이것은 인간이 모여 사는 취락의 형성 발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는 한강이 주는 수리 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식량 생산의 토대인 경작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아가 서울 지방은 인간활동으로 행해지는 교통과 외적(外敵)으로부터의 방어 역할 및 자연환경요소가 주는 예술 창조 활동 등의 주민 생활공간이 어우러졌고, 문화적 삶의 형태를 총망라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보듯이 물의 이용이 편리한 강변에서 일찍이 취락 도시가 발달하였다. 이것은 한강을 끼고 선사문화를 일으킨 서울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일치된다. 즉,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음으로써 인류의 초기 생산단계에 있어서 보다 편의적이고 풍요로운 입지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도시화되기 이전의 서울의 생업조건을 18세기 초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를 통해 보면 “한양(漢陽)은 나라 안의 네 곳으로 압축할 수 있으리 만큼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으로, 길에 밥을 떨어뜨린다 해도 주어 먹을 정도로 흙 색깔이 정결하고 단단한 곳”이라 하였다. 이렇듯 서울 지역의 산과 물은 주민들이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입지조건을 제공하였다. 또 한강 유역 평야지대는 토지 생산력이 높아 인간생활에 알맞은 집의 대지와 경작지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서울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 되었고, 그 흔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고 있다. 한강 유역에서 우리 조상들이 생활을 전개한 역사는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것만도 면목동을 비롯하여 암사동·가락동·역삼동·성동구 응봉 등 상당수에 이르며, 특히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과 연결되는 면목동 아차산 북사면 일대는 발굴작업에 의해 그 유구(遺構)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한강 일대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 유적은 140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주거지 패총 등 유적들은 한강 중류에 위치한 서울 부근과 북한강 유역의 춘천 부근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시 한강 하구의 여러 섬들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서울 지방의 신석기 유적으로 정식 발굴 조사된 암사동 주거지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문화로 대표되며, 그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함께 주목을 끈다.

약 6천년 전의 암사동 유적은 대동강 유역의 지탑리·궁산리 유적과 함께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에 핵심적인 유적이다. 아울러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백제문화층으로 이어진 곳으로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신석기문화는 어로·채집·수렵으로부터 점차 정착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경제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며, 후기에 이르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석기혁명은 강변을 무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인구의 증가와 취락의 형성으로 안정된 정착생활을 전개하였다.신석기문화를 이어 기원전 10세기경 청동기문화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청동기문화는 무문토기(민토기)와 함께 전개되는데, 무문토기인들이 우리의 직접 조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강 유역의 청동기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3세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지방의 청동기 유적으로는 도곡동 매봉터널 위의 역삼동 움집터, 가락동 움집터, 가락동 5호 움집터, 가락동 4호 움집터, 응봉 유적, 아차산 유적 등이 있다. 특히 가락식 토기로 표현되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문화는 한반도 동북지방 계통의 구멍무늬토기문화권과 서북 계통의 팽이토기문화권을 중계 ·혼합하여 서울 지방의 통합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묘제인 지석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로, 서울 지역에서는 원지동·양재동 ·개포동·고척동 등지에 산재되어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의 문화로 생각할 수 있는 강화도 지석묘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러 그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한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은 대부분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위의 하천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생활용수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잡곡 농경·벼농사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하였다. 아울러 벼농사의 시작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경제생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주 흔암리 유적의 탄화(炭火)된 쌀의 출토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아가 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하여 정치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한편 광복 전후 실증주의사학(實證主義史學)을 대표하던 이병도(李丙燾)는 1950년대에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자가 한반도를 제패하였다’고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한강의 중요성은 고래로부터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이는 한강 유역이 고대의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역사의 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삼국이 서로 차지하고자 했던 한강의 중심에는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존재하였다. 위례성은 고대국가의 도읍지로서 오늘날 서울 지역과 같은 지위로 한강과의 관련을 통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은 경제·군사·문화·대외관계 면에서 통일된 국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고대 서울의 역사와 문화는 한강이 주는 수리 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농업 경작지를 배경으로 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한강 유역의 풍부한 수량과 오늘날 김포평야, 여주·이천평야, 평택평야 등 넓은 충적평야는 고구려·신라의 세력 확장과 유지에 따른 경제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탐낼 만한 땅이었다.또한 한강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전국의 물산(物産)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많이 집산(集散)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고대 이후 전근대사회에서는 조운(漕運)·수운(水運)의 중심지가 되었고, 육로 또한 이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큰 물줄기로서의 한강은 외적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장애물이었으며, 수동식 무기를 이용하던 전쟁에서는 관방(關防) 기능의 효용이 가장 뛰어난 자연조건이었다.이러한 한강의 역할은 농경을 통한 경제적 안정, 군사방어의 효용성 제고, 문화의 수용과 전파, 물자교류와 외교통상의 확대 등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삼국은 위의 여러 조건을 통틀어 정치적 통일을 꾀하고 강력한 영역국가를 완성하고자 한강 유역의 확보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쟁패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던 삼국은 그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국세를 펼쳐나갔다.

압록강 중류 집안(集安)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평야에서 성장한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두대간을 넘어 남한강을 따라 진출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던 백제는 경기 ·충청·전라·강원 일부를 영토로 하는 영역국가로 성장하였지만,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구려와 신라의 팽창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리적 여건과 철기농경문화의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3세기 고이왕 때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남당(南堂) 정치를 행하였다. 나아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391년 7월에 직접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를 건너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에 육박하였으며, 백제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427년에 도읍을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한강 유역 경략을 추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서울 지방의 한강 유역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고, 남평양(南平壤)이라는 별도(別都)를 두었다.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 천도와 더불어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치고 국가체제를 강화하였으며, 551년 신라 진흥왕과 더불어 공동작전을 펴 한강 유역의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2년 후에는 신라가 백제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치고 한강 하류를 장악하게 된다.

신라의 한강 하류 장악은 삼국통일의 거점을 확보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한편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축출한 마지막 격전지는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파주·연천·포천·양주 일대로서 칠중성 전투와 매초성 전투가 이루어졌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당나라와 연합전선을 꾀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으며 나아가 이 지역에서 외세인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한강 유역의 득실은 삼국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서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즉 한강 유역은 한국 민족사에 있어서 최종 통합세력을 출산·유지하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으며, 삼국문화를 아우르면서 통일된 민족문화를 이루게 하는 터전이 되었다. 이후 통일된 정치체제에 따라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단일문화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한강 유역은 일선 군사 지휘권자가 일반 행정을 겸하던 지역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어 통치하는 민사행정구역으로 변하였다. 삼국통일 후 한강 유역에는 한산주(漢山州)가 설치되었고, 군영으로 한산주서(漢山州誓)와 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乃斤停)이 설치되었다.

신라의 통치권이 아직 대동강 이남 임진강 북쪽에 미치지 못하고 당나라·발해와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있던 실정에서 한산주는 변방지대로 군정에 의해 지방행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민정이 회복되면서 757년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개칭되었고, 지금의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어 태수(太守)와 소수(少守)의 지방장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신라의 실질적인 영역이 대동강 유역까지 확대됨으로써 한양군은 변방의 군사적 성격을 벗어났다. 즉 선덕왕 3년(782)에 황해도 일대에 패강진(浿江鎭)이라는 군사행정구역이 설치됨으로써 한양군은 이제 군사기지에서 명실공히 민사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한편 한양군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은 신라 말기에 김헌창의 웅진 반란에 이어 그의 아들 김범문이 반란을 일으켜, 여주 등 한강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여 서울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자 북한산성을 도모한 사건을 통하여 증명된다. 이러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신라 말기 지방세력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며, 급기야 9세기 말 지방 호족세력을 재편성한 후삼국사회가 형성된다.

898년 궁예의 휘하인 왕건이 한강 유역인 양주와 견주 지역을 공략하고 패서도와 한주 관할의 30여 성을 장악하니,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은 궁예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어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은 고려에 편입되어 940년에 한강 이북의 한양군은 양주(楊州), 한강 이남의 한주는 광주(廣州)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왕건 세력이 한강 유역의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지정학적 기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즉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한강 유역의 호족 세력들은 대부분 왕건에 협조하여 이후 고려의 중추적인 귀족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왕규의 광주 왕씨를 비롯하여, 서희의 이천 서씨, 강감찬의 금천 강씨, 윤관의 파평 윤씨, 이자연·이자겸의 인주 이씨, 허경·허재의 공암 허씨 등 대표적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으며, 한양 조씨, 한양 한씨, 양주 송씨, 행주 기씨 등이 번성하였다.

고려시대 서울 지방은 국초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漢陽)으로 불리었다. 983년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한강 유역 이북은 양주목(楊洲牧), 이남은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하게 되었다.

특히 문종 21년(1067) 양주에 서경(西京)·동경(東京)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이 설치되어 서울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남경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보다 민심 수습을 위한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 일치한 남경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약 10년만에 폐지되고, 숙종 때 다시 재건되어 북악 아래 오늘날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는 터에 연흥전 등 궁궐이 신축되었다. 한편 1308년 충선왕이 관제개혁에 따라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면서 단순한 지방도시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한양부는 고양·양주·포천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게 되었다. 아울러 왕의 순행(巡幸)과 어의(御衣) 안치 등 정치적 중요성은 사라지고,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놀이와 사냥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충숙왕은 한양에 가서 사냥을 하고, 그 12년에는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한강 가 용산에 놀러와서 행궁에서 왕자를 낳으니, 이가 용산원자(龍山元子)이다. 이렇듯 한양부는 남경 때의 국가 기업 융성을 위한 순행처가 아니라 단순한 휴양지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정치에 따른 배원정책(背元政策) 실시와 관제의 환원으로서 남경이 부활되기도 하였으며, 왜구의 창궐에 따른 천도 움직임으로 한강 유역 서울 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었다. 즉 우왕 9년과 공양왕 2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6개월씩의 한양 천도에 이어 조선왕조의 한양 천도로 확실하게 나타났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나 군사·사회·경제적으로 한강을 터전으로 한 한양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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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강 유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는 한강을 허리띠로 하고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형성하였다는데 더욱 크게 부각된다. 1394년 조선왕조 정부가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비록 관할구역의 변화가 있었지만 이후 오늘날까지 600여 년간 우리 나라 수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한양 천도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과 신 왕조 창건과정에서 고려를 따르는 구 귀족세력의 저항을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들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인문지리적(人文地理的)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즉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지리적 위치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지세가 훌륭하여 생업의 터전으로 적당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도읍지로서 부각되었던 것이다.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 생산물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국가 통치를 위해서 농업경제가 사회 하부토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농산물을 현물조세(現物租稅)로 수취하여, 중앙권력기관 곧 왕궁과 관아가 있는 곳으로 운반하여야 했다. 따라서 세곡(稅穀)의 운송은 국가적으로 중대사의 하나였으며,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에 바닷길과 내수로(內水路)를 이용한 조운(漕運)에 의해 대량의 조세가 수송되었다.

그러므로 도읍지로서의 위치는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 주목되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은 바로 이러한 곳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북악 아래 자리잡은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의 5대 궁궐이나 종묘·사직단·도성·관아·원구단·성균관 등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시설물들은 바로 한강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부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성(漢城)은 풍수지리적으로 삼각산(북한산)을 진산(鎭山, 또는 祖山)으로 하고,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낙산(낙타산, 타락산)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목멱산(남산)을 안산(案山)으로, 개천(청계천)을 내명당수(內明堂水)로 하였으며, 한강을 외명당수(外明堂水)로 하여 그 남쪽에 조산(朝山)인 관악산을 두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한강의 상류로부터는 경상도·강원도·충청도와 경기도의 조운이 모여 용산강 강안에 있는 강창(江倉)에 미곡·포목·목재 등이 집결되었고, 하류로부터는 황해도·충청도·전라도의 조운이 모여 마포강 연안 강창에 수합되어 관료의 녹봉·군사비·관공서 운영비 등을 비롯한 한성 주민의 생활필수품으로 쓰였다.

반면에 수운교통에 절대적 존재이었던 한강은 육상교통에 있어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진(津)·도(渡)가 설치되어 나룻배가 이용되었고, 연산군 ·정조 등 국왕이 강을 건널 때는 주교(舟橋, 배를 엮어서 만든 다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군사기지로 진(鎭)을 설치하여, 통행인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변시설은 조선후기에 들어 전국에서 올라오는 물화(物貨)의 집산지가 되었다. 아울러 한강변에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는 상인집단이 형성되어 운수업과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들은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18·19세기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잉태시킨 시대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용산·마포·서강·동작·두모포·송파 등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운종가(雲從街) 일대의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市廛)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 시전상인을 능가하여 서울의 상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한편 한강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는 자연적 요새 기능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관군이 남한강의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 대신은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파천(播遷)하였다. 이때 수도방어책으로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제천정(濟川亭)을 지휘소로 삼아 한강을 방어하게 하였다.

당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였지만,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또 양평의 구미포, 여주의 마탄 등지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평양으로부터 패퇴하고 행주에서 참패한 왜군은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측을 외면한 채 명군(明軍)과 강화회담을 추진하였다.

한강변 원효로4가와 청파동 일대에 주둔한 왜군은 명군과 용산강에서 선상회담(船上會談)을 진행시켰다. 이 때 조선측에서는 용산창(龍山倉)과 도성 안의 식량 저장소를 불태우는 등 자력 탈환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전쟁 종결을 서두르던 명의 술책에 따라 화의가 성립되고 왜군의 한성 철수가 이루어졌다.

땅은 유구하고 세월은 흐르는 것으로 이 때의 명과 왜의 강화회담 터인 심원정지(心遠亭址)는 조선말 영의정 조두순의 별장이 되었고 천연기념물인 백송이 남아 있는 문화유적지로 현대인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면서 한강의 천연요새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결국 한강변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조선말기에 이르러 한강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대응하며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초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왔고, 급기야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187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1876년에는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개항 요구와 더불어 한강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이 한양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 당인리 일대는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開市場)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강변에 몰려든 외세와 이들에 의해 강요된 강변의 교역·교통·산업 등의 변화는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였다. 이는 한강이 민족사의 영광과 고난의 흐름을 같이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한강 이남 영등포 지역이 공업화되면서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 되었고, 점차 노량진 일대가 서울권에 편입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이 새로운 도심권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강대교

한강철교

광복 후 1949년과 1963년의 서울 시역(市域)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명실공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강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더욱이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세(市勢)를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균형 있게 배치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 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열게 되어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을 같이 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한강은 민족문화의 통합성을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의 세계로의 지향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한강을 어우르면서 삼국통일이 이루어져 민족문화와 정치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왕조 또한 일찍이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통일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남경 경영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서의 한성으로 계승되어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 경영의 무대로 이어졌다. 나아가 한강은 한민족 문화 중심에 위치하여 세계문화 창조의 중심무대로서 그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

by 약초마을 | 2009/02/27 17:03 | 기타자료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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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김진영 at 2015/06/14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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