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무기체계

조선시대의 무기체계
조선시대의 무기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거리에 따라 장병기(長兵器)와 단병기(短兵器)로, 사용 용도에 따라 공격무기와 방어무기로 나눌 수 있다. 장병기란 원거리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로서 활과 화살, 각종 화포(火砲), 로켓 화기 등을 말한다. 이에 비해 단병기는 적과 가까운 거리에서 싸울 때 필요한 무기로서, 칼과 창이 대표적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활을 중시하여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하는 장병전술(長兵戰術)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창, 칼에 의한 백병전을 중시하는 단병전술(短兵戰術)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에 비해 일본 민족은 칼을 중시하여 근접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단병전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공격무기로는 각종 칼, 창, 궁시류(弓矢類:각종 활과 화살붙이), 화포류, 공성(攻城)무기 등을 들 수 있다. 방어무기에는 방패와 마름쇠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무기 외에 고려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화약병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널리 실전에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화약무기를 대표하는 화포는 화약의 폭발력으로 화살, 돌, 포탄 등을 발사하는 원통형의 무기로서, 동ㆍ서양에서 다같이 14세기 초에 출현하였다. 그 기술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당시까지의 주무기였던 활과 화살이나 칼, 창 등을 능가하는 살상력과 파괴력을 갖추었다. 화약무기의 등장은 사회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중국에서는 명나라의 통일사업을 촉진시켰고 서양에서는 중세 기사를 무력화시켜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약무기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제작된 때는 고려 말이었다. 부쩍 잦아진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군비 강화의 일환으로 화약무기 개발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약의 제조법, 특히 가장 중요한 원료인 염초의 제조법을 알 수가 없어 중국에서 화약을 수입하다가 공민왕 때에 최무선이 화약제조법을 습득하여 국내에서의 화약 및 화약무기 제조가 시작되었다. 최무선은 화통도감이란 관청을 통해 각종 다양한 화포와 발사물 등을 제작하였다.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신포, 화포, 총통, 철령전, 피령전, 철탄자 등이 이 때 제조된 무기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화약무기는 아직 이를 갖추지 못한 왜구의 소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화약무기의 개발과 보급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소탕이 주목적이었던 고려말과는 달리 국방면에서 여진족이 가장 큰 두통거리였다. 여진족은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유역에 겨주하며 원ㆍ명 교체기 이 지역의 힘의 공백을 틈타 자립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여진족들은 강력한 화약무기는 커녕 철제 화살촉도 만들 수 없어 짐승뿔로 제작하는 등 무기의 수준이 무척 낮았다. 그러나 이들은 잘 숙련된 기마술로 취약한 지역을 신속히 공격하고 도주하는 전술로 조선을 괴롭혔다. 기마병이 지닌 돌파력은 대단히 커서 이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먼거리에서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가 요구되었다. 활의 경우 가장 사거리가 긴 각궁은 약 200보(1보는 약 1.8m)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량으로 제작하기 어려웠다. 또한 활은 수련에 오랜 기간이 필요해 많은 병사를 동시에 훈련시키기 힘들었다.
화약무기는 이러한 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존재였다. 먼 거리에서 적을 저지할 수 있고 또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데다가, 그 큰 폭발음은 적의 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더하여 궁술이 오랜 수련과 강한 체력이 필요한 데 비해, 화약무기는 징집된 일반 양인농민들도 쉽게 익힐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화살을 일정한 거리 이상까지 쏘아보내는 방법만 익히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종 초기까지는 아직 화약무기가 무거워 선박에 장착하여 적의 선반을 공격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고 그나마 화약의 성능이 떨어져 원거리 사격이 어려웠다.
태종 중엽에 이르러 화약의 개량이 이루어져 성능이 종전보다 배나 좋아졌고 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에 넣고 작은 수레에 실어 발사하는 초기 화차(火車)가 제조되었다. 그리고 발사물로 화살 외에 돌멩이, 탄환 등도 넣어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화기가 육지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화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화통군이 편성되어 태종 말에는 그 수가 1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화약 성능으로 충분한 사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포를 크게 만들 수밖에 없어 운반하는 데 극히 불편하였고, 화약의 소비량도 많았다. 그 때문에 변방의 주요지점에만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화약무기는 세종 후반기 들어 대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종전과 같은 양의 화약으로 사정거리를 배 이상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화약무기를 다시 전면적으로 다시 제작하게 되었다. 이 시기 새로 나타난 화기로는 이총통, 삼총통, 사전총통, 팔전총통, 세전총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로켓형 화기인 중ㆍ소 신기전, 주화(走火) 등이 개발되었다. 문종 때에는 화차가 동시에 많은 화살을 사격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까지는 세조 때에 신제총통을 제조한 것을 제외하고는 진전은 없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화약무기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일본이 사용한 조총이라는 신식 개인화기에 의해 유발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조선군인 일본군에게 육상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조선에 화약무기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다양한 화약무기가 제작되었지만 그것은 주로 대형 화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개인화기 부문에서 큰 발전은 없었다. 초기 전투의 패전은 개인화기의 우열에 의해 결정되었다.
당시 조선은 가장 두통거리였던 여진족에 대응하고자 북방 지역에 많은 성과 보(堡)를 설치하고 여기에 화약무기를 배치하여 침입을 막아 내었다. 남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6세기에 남해안 일대에 일본인들이 대거 소동을 일으켰지만 화약무기를 갖추지 못했던 이들을 저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16세기 중엽 화약 제조법을 습득하고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특히 1543년 포르투갈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신식 화승총(火繩銃)인 조총은 조선과 중국이 가지고 있던 개인용 총통(銃筒)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최초에 출현한 개인화기는 손으로 불씨를 가지고 심지에 불을 붙여 점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식은 여러 사람이 조작하는 화포 등에는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나, 개인화기에 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개인마다 불씨를 지녀야 함은 물론이고 언제 폭발이 될지 알 수가 없어 계속 목표를 조준하여야 하는 약점이 있었다. 조선이 개발한 승자총통(勝字銃筒)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개인화기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조총은 신형 화기로, S자로 구부러진 금속제 도구에 화승(火繩)을 끼워 방아쇠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판 모양의 스프링을 사용하여 방아쇠를 당기면 급속히 화승이 화약에 닿아 화약을 점화시켰다. 이에 따라 병사가 원하는 순간에 목표물을 향해 사격을 할 수 있었고, 승자총통보다 총신이 길어 최대사거리 500미터, 유효사거리는 100미터에 달하였다. 게다가 일본군은 100년간에 걸친 전국시대를 통해 많은 전투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조총에 의한 연속 밀집사격전술은 주목된다. 보병부대를 조총, 활, 창 세 종류로 혼합편성하여 조총의 효용성을 극대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조총 등으로 무력해진 상대편을 기병을 이용하여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익히고 있었다.
의주로 피난한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군이 사용한 각종 신형 화기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명나라군의 화기로는 조취총, 불랑기포, 호준포, 백자총통 등이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의 신형 화기를 접한 조선은 이들 화기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총, 불랑기포, 호준포 등의 제작과 개량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 화기는 기존 화기와 함께 이후 조선의 주요 화기가 되었다.
양란 이후 동아시아의 평화기간 동안 화포의 획기적인 개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시기 이 지역 화기의 발사물로는 예전과 같이 화살과 포환이 중심이어서 목표물에 충격을 주어 부수는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유럽은 절대왕정시대와 국민혁명시기를 거치면서 치른 많은 전쟁을 통해 각종 화약무기를 개랑하여 점차 오늘날의 무기와 비슷한 화약무기를 생산하여 실전에 사용하였다. 이는 이후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양 침력의 첨병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인검(寅劍)

인검은 일종의 의장용 보검(寶劍)이다. 동양에서는 천(天)에 대한 사상이 강했던 관계로 왕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하늘의 아들에게 거역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의미 때문에 형벌을 의미하는 부월(斧鉞)을 정벌군 장수에게 줌으로써 장수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수면문(獸面文)이나 성좌(星座) 등이 부월에 표현되었다. 왕으로부터 병권을 상징하는 부월을 받은 장수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검을 소지하게 된다. 통상 이 장검은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시종이 별도로 들고 지휘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인명을 좌우하는 지휘자의 통솔의 의미와 승리를 상징하는 용맹의 의미로 인해 칠성검이나 인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용의 검 외에도 소유자의 무운을 비는 의미로 싯귀를 새기고 실존하지 않은 동물을 그려 새겨 넣거나 화문(花文)을 그려 넣어 상(祥)스러운 무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인검은 간지의 인(寅 : 호랑이, 예로부터 호랑이는 무를 상징)자 들어가는 때에 제작된 칼로 무(武)의 기운이 강하여 부월이 상징하는 바를 구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이 네가지가 모든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사인검(四寅劍), 세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삼인검(三寅劍), 두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이인검(二寅劍)이라고 한다.
참고로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계유조에는 "창원군(昌原君)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古邑之)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도 못하며, 전후에도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三寅劒)과 삼진검(三辰劒)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環刀)는 없습니다."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삼인검과 삼진검은 동일하게 하나의 의장용 군기(軍器)였음이 분명하다. 또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출정하는 신립을 불러 보검(寶劍)을 하사하고 이일이하 제 군사들이 명을 거역할 때에는 이 검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이 검 역시 인검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검일 것이다.
조선검의 특징
도(刀)와 검(劍)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개인 휴대무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단병기이다. 도(刀)는 날이 한쪽에만 있으며, 곡선의 형태로 되어있으며 주로 적을 베는데 사용되었다. 반면 검(劍)은 날이 양쪽에 있으며, 형태는 직선으로 되어 있고 베기와 찌르기를 할 수 있다. 도가 전투용으로 널리 쓰이게 되자 검에만 있던 칼집을 도에도 갖추어 전투복에도 휴대가 용이하게 했다.
검은 칼날의 예리함 보다는 자루 장식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상감(象嵌 : 금속의 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안에 금·은 등을 채워 넣는 방법)의 방법으로 꽃무늬나 별자리 같은 문양을 새기고 의미 깊은 문구를 새겼으며, 옥을 매달거나 박은 옥구검(玉具劍) 등이 등장하였다.
도검은 전투용에서부터 수렵용, 지휘용, 의례용, 장식용, 호신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크기에 따라 장검(장도·대도)과 단검으로 구분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검으로는 환도(環刀)·예도(銳刀)·인검(寅劍)·운검(雲劒)·칠성검(七星劍) 등이 있다.

조선 전기 환도의 크기는 조선 후기의 규격과 비교할 때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실전을 위해 길이가 짧거나, 곧은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진(女眞)과의 전투의 주된 무기가 궁시였고, 환도는 긴박한 상황에서나 사용하는 일종의 방신용이나 호신용의 보조무기에 불과하였던 데서 그 특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환도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접근전 때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왜군의 검(劍)은 길이가 3~4척인데 비해 환도는 짧고 예리하지도 못하여 왜군과 백병전에서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이에 길이가 길고 예리한 예도(銳刀)가 나타났다.
사인검(四寅劍)
시대 : 조선 제원 : 120.4cm 소장 : 육군박물관 사인검(四寅劒)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北斗七星) 문양이 상감(象嵌)되어 있다.
삼인검(三寅劍)
시대 : 조선 제원 : 130.5cm 소장 : 고려대박물관 삼인검(三寅劒)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北斗七星) 문양이 상감(象嵌)되어 있다.
삼인도(三寅刀)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길이 90cm 소장 : 전쟁기념관 인검(寅劍)과 같은 의미를 지닌 칼로서 어피로 장식되었고, 三寅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운검(雲劍)
운검은 임금을 호위하던 운검 무사들이 차던 칼이다. 원래 운검(雲劍)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칼[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로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임어(臨御)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을 어피(魚皮)로 싸고 주홍색으로 칠하였으며,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였다. 이 칼이 사용자의 명칭을 따 운검이라 하였다.
별운검(別雲劍)
별운검은 임금을 호위하던 운검 무사들이 차던 칼이다. 원래 운검(雲劍)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칼[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벼슬로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임어(臨御)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 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을 어피(魚皮)로 싸고 주홍색으로 칠하였으며,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였다. 이 칼이 사용자의 명칭을 따 별운검이라 하였다.
칠성검(七星劍)
시대 : 조선 제원 : 길이 82cm, 칼몸 59cm, 자루 22.6cm 소장 : 육군박물관 일종의 보검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환도(環刀)
조선시대 사용된 대표적인 군도(軍刀)로, 군도는 크게 예도(銳刀) . 왜검(倭劍) . 제독검(提督劍) . 쌍검(雙劍) . 쌍수도(雙手刀) 등의 종류가 있었다. 환도는 예도의 일종으로 허리에 차는 칼로서, 전체 길이는 1m 정도이다. 환도라고 부르게 된 것은 칼집이 있어 고리를 달고, 이 고리에 끈을 드리우고 그것을 찬데 있었다. 일반적으로 요도(腰刀), 패도(佩刀)라 호칭하기도 한다. 환도는 전투용 무기였지만 개인이 소지할 적에는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렇듯 평상시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높아지자 휴대의 간편성과 비상시의 사용성에 중점을 두게 되자 환도의 제원은 점차 짧아지고 가벼워졌다. 그러나 임란이후 왜검에 대응하면서 점차 길어지고 예리해졌다. 아울러 병사들의 필수 휴대무기가 되어 단병기의 주종이 되었다. 당시 훈련도감군에게 지급되었던 무기 규정을 살펴보면 환도는 마군(馬軍)과 포수(砲手) 살수(殺手)인 보군(步軍) 모두에게 분급된 단병기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단도(短刀)나 제독검(提督劍)은 모양과 제원에 있어서 조선후기의 환도와 동일하였다.
횃대(護身刀)
개인 호신용 칼로 평상시에는 방안에서 옷을 걸어 두는 횃대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횃대라는 명칭이 생겼다.
월도(月刀)
월도는 일반적으로 그 칼날의 모양이 반달과 같다하여 언월도(偃月刀)로 불리고 있다. 조선식과 중국식이 있는데 자루의 길이가 6척 4촌 날의 길이가 2척 8촌, 무게가 3근 14량으로서 칼날의 위 부분이 넓적한 것이 특징이었다. 언월도는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고 조련이나 의장의 웅장함을 시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조선의 월도는 얇아서 가을의 가랑잎 모양처럼 조잡했다. 반면에 중국식은 모가 크게 나서 위맹을 떨쳐서 적의 간담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중국식은 무게를 무겁게 하여 보통 사람이 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유명한 언월도는 그 무게가 80근이나 혹은 120근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월도류는 일반적으로 모양과 용도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끝이 날카로운 피도( 刀) 참마도(斬馬刀) 혹은 감도( 刀), 눈섶과 같은 미첨도(眉尖刀), 봉의 부리와 같은 봉취도(鳳嘴刀), 반달과 같은 언월도, 머리가 굽은 굴도(屈刀), 앞이 모가 난 방도(方刀) 등이 있다.
마상월도(馬上月刀)는 월도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마상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이 붙었다. 마상도(馬上刀)는 길어야 하는데 앞은 말머리를 지나야 하고 뒤는 말꼬리를 지나야 한다. 마상월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청룡이라 불러짐은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유래된 것으로 칼은 좌청룡의 기상이 있었다. 또 언월도의 제도는 용구(龍口)가 칼날을 머금고 칼날 가운데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을 새겼던 것이다.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던 관우공은 조선에 있어서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에 관우공의 혼령이 나타나서는 평양성전투와 울산 도산성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서 사당을 세웠다.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워 조선을 구해준 군신(軍神)으로 참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칼을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하여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삼장군 언월도(李森將軍 偃月刀)
시대 : 조선후기
지정 : 시도유형문화재 63호(1976. 01. 08)
제원 : 길이 191.5㎝,무게 2.9㎏
소장 : 이재명(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이삼 장군은(1677∼173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조 원년(1725) 어영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어, 함은군에 봉해졌다. 상월면 석종리에 무덤과 영당이 있고, 주곡리에 있는 고택에 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언월도에 용광사우두성(龍光射牛頭星)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다.
창류(槍類)
창은 긴 장대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였다. 조선 전기에 창의 종류는 모(矛), 극(戟), 창(槍) 등 3가지가 있었다. 모는 짧은 창의 일종으로 모의 머리부분의 예리함에 의존하는 무기로 초목이 무성하여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형에서 사용하기에 유리한 무기였다. 극은 창과 모의 장점을 살려 잡아당기고 찍고 찌를 수 있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 살상력이 높은 무기였다. 하지만 갑옷의 발달로 점차 그 기능을 잃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전투무기가 아닌 하나의 의전용으로 사용되었다. 창은 원래 평지에서 접근하여 싸울 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조선 전기의 창술은 보병용이 아닌 기병용의 기창(騎槍)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무과나 무사의 선발 과목에 기창이 포함된 것이다. 다만, 조선 전기에 사용된 창은 길이가 짧아 전투용으로서의 기능이 약했을 뿐 아니라, 장병술(長兵術)의 발달로 궁시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접근전에 사용되는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도검류 뿐 아니라 낭선(狼 ), 장창(長槍), 당파(  ), 죽창(竹槍), 기창(旗槍) 등의 다양한 창이 들어오게 되었다.
장창(長槍)
길이는 1장 5척 창자루는 주목이 제일이라고 척계광(戚繼光)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중국식과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즉, 오늘날 창끝에 혈조(血槽)가 있다. 창날 아랫부분에 작은 석반을 대고 창자루 아래에 준이 있다.고 하여 훨씬 발전한 장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원은 치우 황제가 더불어 싸운 것이 창이고 제갈량이 나무로 창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길이가 1장 2푼이고 창끝은 철로 되어 있다.에서 밝히고 있다. 장창법은 중국에서 양씨가 정통하였다. 기예로서의 장창법은 전보와 후보로 나뉘어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장창법 24세중 명 진영에서 조차 12세만 전해져 온 것을 한교(韓嶠)가 창조 개발한 것이다. 즉 기효신서에 나오는 장창법 24세를 새로 구성하고 조선인의 체격과 정서에 맞게 창조하였거나 혹은 전래의 장창법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의 원병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도 주로 장창 돌격법에 의존한 것이라 한다.
죽창(竹槍)
죽창은 자루의 재료가 일반 나무가 아니라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20척으로 장창보다 길었다. 머리날이 4촌, 손잡이가 5척이며, 손잡이 이상은 물감을 칠했다. 장창과는 달리 석반(錫盤)이나 준( )이 없었다. 이 창은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죽창은 나무자루로 된 장창에 비해서 가벼운 장점이 있었으나, 중간이 휘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왜창은 이 단점을 보완하여 대나무를 쪼개서 이것을 모아서 아교로 붙이어 굳게 하고 옻을 칠했던 것이다. 왜창은 길이가 20척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굳센 날이 매우 날카로웠다. 또한 조그마한 힘에도 매우 깊이 들어갔으며, 허리부분을 잠시 굽혀 놓아도 곧바로 펴지는 탄력성이 있었다. 기예 자체는 다른 것에 비하여 단조로운 편이나 병장기가 길고 창끝의 날카로운 날로써 좌우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적을 압도할 수 있다.
기창(旗槍)
기창은 일명 단창(短槍)이라고도 한다. 날의 길이가 9촌, 자루의 길이 9척으로 장창의 반절 크기 정도였다. 창의 전반적인 형태는 장창과 동일하여 석반 이하에는 검고 흰 칠을 번갈아 했으며, 다섯째 마디쯤에 황색이나 홍색의 작은 깃발을 달았다. 중국의 기록에서는 기창이 명(明)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고려사} 여복지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기창이 의장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예로서의 기창은 중견을 습격하거나 기습을 당했을 때의 혼전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저돌적인 돌격 자세와 함께 전투 좌우로 자유자재한 공격법을 습득하게 위한 기법으로 편성되었다.
무예도보통지의 18기 (마상 6기)
조선 후기(정조 14년(1794))에 편찬된 무술 훈련교본. 자세한 그림과 한글 설명이 붙어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 조선의 무술교본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무예도보통지에 기술된 무예의 종류이다.
보졸 18반
장창(長槍) - 1장5척,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창.
긴 창을 말하며, 전보와 후보로 이루어져 있는 장창의 자세는 대적, 기만, 방어, 공격세로 구성되어 있다. 날카롭고 빠른 왜구를 제압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 장창이다. 임진왜란 중 남병(절강병) 참장 낙상지가 왜군이 지키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 주로 주로 사용된 무기이며, 이후 총·포가 개발된 시기에도 여전히 실전성을 갖고 있어 그 유용함이 계속되었다.
죽장창(竹長槍) - 20척 4촌, 대나무를 쪼개 아교로 붙여 씀.
자루가 길므로 자세는 아주 단순하며, 대나무를 여러 겹 붙여 만든 긴 창으로 주 용도는 적의 기병을 막는데 쓰였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자세는 적과 적의 말을 위협하는 자세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처럼 상대의 기병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곧장 창을 세워 적의 예봉을 꺽는다. 특히 찌른 후에 창을 뽑으며 급히 물러나는 [백원타도세]가 중요한 특징이다.
기창(旗槍) - 9척 9촌, 혈조와 깃발(적의 무기를 휘감고 시야를 가림)이 붙어 있다.
단창이라고도 불렸으며 고려시대에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익혔던 무예이다. 진법(陣法) 운용시 각 대오의 위치와 정렬 그리고 이동시에 기창수가 진의 이동을 담당하였다. 특히, 창에 달린 깃발을 이용하여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 야간 기습공격시 효용성이 높았던 기예이며, 자세중-퇴산색해-는 적의 기병을 공격하는 자세로 창의 특징을 포함한 기예이다.
당파(鏜鈀) - 7척 6촌,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삼지창으로 알려짐.
삼지창으로 더 많이 알려진 당파는 창을 막기에 좋은 무기이며, 명의 척계광이 왜구의 장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대표적인 무기이다. 가운데 창에 작은 포를 달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룡, 나창, 가창과 같은 자세는 평지에서 창을 든 상대와 대적하는 자세이기도 하며 동시에 기병을 제압하는 기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들어 기병 말의 눈을 찌르고, 말의 발굽을 찌르는 기법이 수록되어 있다.
낭선(狼筅) - 1장5척, 가지를 치지 않은 대나무를 그대로 쓰는 기예. 군용의 낭선은 적당히 가공한 형태의 가지달린 대나무 창이었다.
긴 대나무에 가지를 세우고 사이에 철심을 붙여 적의 접근을 막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한 무기이다. 그리고 철심 부분에 독을 묻혀 직접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의 공격법 또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낭선은 척계광이 개발한 원앙진이라는 진법에서 그 위용을 드높였는데, 등패와 한짝을 이뤄 상대를 근접하지 못하게 하여 등패의 공격을 도왔다.
쌍수도(雙手刀) - 6척 5촌에 2근 8냥짜리 두 손으로 사용하는 큰 칼. 중국의 장도長刀(명 대에 일본도를 중국식으로 소화한 기술)가 들어온 것이나, 무예도보통지 편찬시절에는 예도나 요도로 펼쳤다 한다.
중국에서는 장도(長刀)라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무예제보까지는 장도라 불렸다. 그 이름처럼 길고 큰 칼을 쓰는 법으로 왜구의 검에 대적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특히, 칼이 길어 칼의 중심을 잡아주는 동호인이 상당히 크게 발달하였다. 독특한 자세로는 향좌방적, 향우방적, 향상방적으로 이어지는 방어를 바탕으로한 공격일 것이다. 이 검보는 특히 왜검을 대적하기 위해 고안된것이어서 그 기법에 왜검의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내포되어 있다.
예도(銳刀) - 4척 3촌에 1근 8냥, 환도(環刀, 고리를 사용해 허리에 매기 때문에 붙은 이름. 칼자루 뒤에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와는 다름)의 다른 이름이며, 가장 기본적인 조선의 도이자 도법이다.
중국에서 조선세법이라고 불리울 만큼 조선의 독특한 칼쓰는 법이 수록된 검법이다. 전체 28개의 자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선참사세와 양각적천세와 같은 담력을 키우는 자세도 함께 수록되어있다. 조선 검법의 핵심이며 가장 기본적인 칼쓰는 법이라고 할수있다. 무예도보통지에 격법(擊法), 자법(刺法), 세법(洗法), 격법(格法)등 자세한 법이 나온다.
왜검(倭劍)-왜도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일본도를 쓰는 기법이다. 토유류, 천유류, 운광류, 류피류 등이 있다.
토유류, 운광류, 천유류, 류피류 4개의 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수력 때문에 打法이 독특하게 발달한 검법이다. 아주 빠르고 강렬한 검법으로 앞을 향하여 쭉쭉 질러 가는 것이 특징이다. 山時雨-산속의 소나기, 柳紗-버드나무 가지, 流星出-떨어지는 별동별등 시적인 표현이 독특한 검법이다.
교전(交戰) - 2인이 왜검을 겨루는 기예. 조선에서 확립된 검법이다.
조선의 검선 김체건이 왜검을 응용하여 격검하도록 만든 것이며, 무예24기 중 가장 늦게 완성된 검법이다. 압(壓)과 접(接)을 적절히 응용하여 상대의 검을 제압하고, 연속적인 공격과 방어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교전 무기는 목검에 가죽을 입힌 피검(皮劍)을 사용하여 교전을 하였다.
제독검(提督劍) - 3척 13촌, 요도(腰刀)를 쓰는 기술로 명의 제독 이여송에게서 전래받았다 하여 제독검이라 한다.
이여송의 '제독'이라는 계급이 검보의 명칭에 붙은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완성된 검법이다. 총 14세로 되어 있으며 향좌격적과 향우격적이 좌우로 빠르게 회전하며 검선을 살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 효과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적진에 고립되었을때 퇴로를 회전하며 뚫는 것이 핵심요소이다.
본국검(本國劍) - 역시 요도(腰刀)를 쓰는 기술로 현재 가장 잘 알려진 검법이다. 신라시대로부터 전래받았다 한다.
이덕무는 본국검을 신라의 화랑 황창이 창안한 검보라고 소개하였다. 정확한 자료로 살펴보면 조선의 금군 기록인'금위영등록-1696'에 본국검을 수련하였다고 나오므로 아마도 조선 전기에도 수련되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총 24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후좌우 자유롭게 공격과 방어가 이뤄져 정갈한 맛이 나는 검법보이기도 하다.
쌍검(雙劍) - 2척10촌 5푼짜리 두개의 검을 동시에 사용하지만, 보통 요도중 가장 짧은것을 사용한다. 가장 화려한 검법이다.
두 개의 검을 들고 구사하는 검법으로,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져 좁은 공간에서 그 위력이 배가된다. 오화전신세와 장검수광처럼 두개의 검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 매력적인 검법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윤복의 풍속화처럼 기생들 또한 긴 쌍검을 사용하여 검무를 추는 것 또한 살펴 볼만한 일이다.(현재 복원된 검무는 너무 짧으며, 칼날이 접어진다)
월도(月刀) - 8척 12촌에 4근 13량의 대도. 삼국지 관우의 언월도를 생각하면 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 사용한 청룡언월도와 유사하며, 동선이 크고 위력이 있어 참마도(斬馬刀)라 불리울 정도로 파괴적인 검법보이다. 특히 왜검을 제압하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맹호장조세와 용광사우두세 같은 회전법과 연결된 자세의 특징이 있다. 오관참장세의 경우 삼국지의 관우가 조조의 군영을 빠져나오며 다섯 관문의 장수를 베는 기법의 고사가 전해진다.
협도(挾刀) - 10척에 4근의 무거운 칼, 칼등에 삭모(술)이 있다. 월도와 함께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 아름다운 눈썹을 닮았다 하여 미첨도라고도 불린다.
눈썹 모양이어서 미첨도라 불리우고, 영조 시대까지 협도곤으로 불리다가 정조시대에 협도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적의 진을 부수는데 효과적이어서 파도(破刀)라 불렸다. 무예24기 가운데 가장 무거운 병기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월도보다 더 그 세세한 쓰임새가 효과적으로 잘 들어나 있다.
등패(藤牌) - 등나무로 만든 방패를 중심으로 요도와 방패 뒤에 숨긴 표창을 사용하는 기예.
등나무로 만든 방패와 요도, 표창을 사용하는 무예이다. 남만(베트남)의 등나무을 이용하여 방패를 만들었다가 조선초기에는 나무판에 쇠가죽을 붙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병은 둥근 방패, 보병은 긴 사각 방패를 사용하였고 조총과 화살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원패와 연미패(긴마름모꼴-제비꼬리)-재질은 청동-가 함께 사용되었다.
권법(拳法) - 24기 중 유일한 맨손 기예. 무기술을 익히기 전에 수련하였다.
권법은 맨손으로 익히는 무예로 검을 배우기 전에 익혔다. 백병전시에 무기없이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현각허이세와 요란주, 순란주, 복호세 등 중국 권법의 영향을 받은듯 하다. 권법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주요한 특징이 발보다는 손을 주로 사용하는 수박의 형태가 남아 있는듯 하다. 문헌을 찾아 보면 태조장권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고도 한다.
곤방(棍棒) - 7자에 3근 8냥. 목봉이다. 끝에 '압취'라는 오리부리모양의 칼날을 장착하기도 한다.
한자로는 곤봉이나 읽기로는 곤방으로 읽는다. 무기술의 기초로 익혀야 했으며, 특히 음양수(陰陽手)를 익히는 기본이 되는 무기술이다. 대적세, 대전세, 대조세 그리고 하천세, 도두세, 제미살세 등 서로 상대의 곤을 부딪치며 익히는 것이 주요하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봉은 연봉, 그리고 일본은 강봉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연봉과 강봉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강봉을 사용하였다.
편곤(鞭棍) - 쇠도리깨술. 기병의 대보병전에 유용하다고 알려졌다.
쇠도리깨를 연상시키는 무기술로 연속 공격이 쉽고 강한 타격력을 바탕으로 기병들의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상대의 병기를 감아서 공격하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난감한 무기이다. 성을 공격할때 굽어지는 속성으로 인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마상 6반
기창(騎槍) - 장창을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기예.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 기법을 말하며, 조선 초기부터 무과 시험의 주요한 과목이었다. 주요한 기법으로는 말위에서 전후좌우로 창을 휘둘러 적을 찌르는 기법이다. 전체적으로 기병(騎兵)무예 즉, 마상무예는 조선건국 초기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의 오랑캐들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해 중점적으로 연마 되었던 기예이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갑을창(甲乙槍)이라하여, 두사람이 짝이되어 교전하는 방식이, 그리고 삼갑창(三甲槍)이라하여, 세사람 혹은 세 대오가 둥근 원을 그리며 서로 겨루는 방식의 실제 전투방식과 흡사한 무예를 연습하였다.
마상쌍검(馬上雙劍) - 쌍검을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기예.
말위에서 검 두 개를 사용하는 기법을 말하며, 특히 항우도강세, 손책정강동세, 환고환패상세, 운장도패수세처럼 중국 무장들(항우,손책,유방,관우)의 이름이 자세에 사용되었다. 특히, 마상쌍검은 정면에 말 머리가 있으므로, 몸을 좌우로 많이 비틀어 양 옆의 적을 신속히 베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마상월도(馬上月刀) - 월도를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기예.
말 위에서 월도를 사용하는 기법으로, 조선의 기병들이 필수로 익혔던 기예이다. 특히 월도의 무게와 길이 문제로 월도, 중월도, 청룡도 등으로 다양하게 무기를 변형하여 익혔다.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장수의 모습이 남겨진것으로 보아, 실제 작업에 참여 했던, 백동수(장용영 초관)의 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상편곤(馬上鞭棍) - 말 위에서 편곤을 사용하는 기예이다.
말위에서 편곤을 사용하는 법으로 자루를 약간 짧게하여 기병들이 항시 착용하였던 기본 무기였다. 보통때의 연습은 편추(鞭芻)라 하여 짚으로 만든 인형을 세워두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편곤으로 내려치는 연습을 하였다.
격구(擊球) - 서양의 폴로 경기와 유사하며 말위에서 하는 공놀이. 기마술 훈련용 기예이다.
서양의 폴로(polo)와 비슷하며, 고려의 귀족들이 즐겨하였고, 여인들 또한 그 기술을 익혀 널리 말을 활용한 기마민족의 전통을 경기로써 이어지게 하는 기예이다. 그리고 1725년 이후 부터는 무과의 실기시험에서 제외되어 이후 점점 사라진 기예이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격방(擊棒)이라는 놀이가 모든 계층에서 행해졌는데,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평민들까지 즐겨 행하여졌다. 여기서 격구는 말위가 아닌, 평지에서 걸으며 하는 일종의 골프 형태의 놀이였다.
마상재(馬上才) - 말타기 기술. 기병들의 기마술 훈련용의 기예이다.
말 위에서 일종의 재주를 부리는 기예이며, 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모든 기병들이 필히 익혀야만 했던 기예이다. 특히 일본의 통신사로 가서 시연을 보였던 기병들은 칭송이 일본열도를 뒤흔들 정도였다. 마상무예를 연마하는 말들은 전체적으로 다리가 짧으며 몸이 튼튼한 호마를 사용하였다.<자료:http://muye24ki.com/>
타살무기류(打殺武器類)
편곤(鞭棍)

편곤은 도리깨 모양으로 된 공격형 무기로 적을 내리치는데 편리한 무기이다. 편곤은 조선식과 중국식 두 가지가 있었다. 조선식은 편곤의 편(鞭)의 길이는 8척 9촌, 자편(子鞭)의 길이는 2척 2촌 5푼, 곤(棍)의 길이는 10척 2촌 5푼으로서 모두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 머리 부분이 철을 재료로 했기에 철편곤 혹은 철편이라고도 하였다. 편곤은 특히 성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수성, 공성전에 유리한 무기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두사람이 갑을로 각각 왼손으로 편과 곤을 나누어 잡고 처음 용약재연세(龍躍在淵勢)로부터 시작하여 상골분익세(霜 奮翼勢) . 대당세(大當勢) 등의 공방(攻防) 자세를 취함으로써 심신의 단련을 도모할 수 있는 편곤보(鞭棍譜)가 기술되어 있다.
마상편곤(馬上鞭棍)은 편곤이 보병용 무기인데 비해서, 마상편곤은 기병용이었다. 마상편곤도 조선식과 중국식의 두 가지가 있었다. 조선식은 편의 길이가 6척 5촌이고, 자편의 길이가 1척 6촌으로 보병용인 편곤보다 제원면에서는 작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국왕의 시위군(侍衛軍)이 마상편곤으로 고양에서 적을 막았는데 대로에서 일격을 당해 즉시 패하고 말았다. 이는 시위군의 마상편곤이 연결 고리가 매우 짧을 뿐만 아니라 그 자루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후 만드는 법은 개량하여 자루는 둘레의 차가 크고 굽게 하고, 6개의 고리를 이어서 길게 하였다. 또 도리깨는 4개의 네모난 철엽(鐵葉)을 대고 두루 못을 쳐서 못이 뾰족 뾰족 튀어나오게 하였다. 이 마상편곤은 여러 가지 장점이 모여서 치는 무기로는 제일 좋다.
곤봉(棍棒)

곤봉은 이미 고대로부터 무기로 사용했으며, 고려조에서도 백봉(白棒)으로 군사를 무장시킨 일도 있었다. 곤봉은 봉의 이점과 찌르는 칼날의 이점을 이용한 무기이다. 곤봉의 길이는 7척, 무게는 3근 8량, 칼날의 길이 2촌이며, 가운데 칼날이 있는데 한 면에는 등이 세워져 있고 한 면에는 피 흠인 혈조(血槽)가 있다. 곤봉을 만드는 법은 6가지가 있다. 단단한 나무를 재료로 하여 길이 4∼5척에 그 위 부분은 철로 싼 것. 머리부분에 예리한 칼날을 달은 것. 날도 낚시도 없고 철 끌개만 댄 것. 곧은 침을 위에 대어서 이리 어금니 같이 된 것. 동체와 끝이 고루 큰 것. 보리 타작하는 도리깨와 같은 것으로 몽둥이에 날이 없었는데 칼날의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2촌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오리 주둥이와 같이 두드려서 칼날을 만들었다. 이는 몽둥이와 칼의 기능을 복합시킴으로써 두 가지 서로 단점을 보완시켜 주었다. 남방 지역에서는 곤(棍)이라하고, 북방 지역에서는 백봉(白棒)이라 하였다. 대개 옛날에는 철로 머리를 만들었는데 척계광(戚繼光)이 처음 날을 덧붙였다. 곤봉의 명칭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달랐는데, 창의 길이를 줄여서 만들어서 창과 비슷한 모양의 수( ), 막대기 모양의 장(杖)과 같은 뜻의 정( ), 몽둥이 모양의 오(吾), 도리깨 모양의 부( ) 등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곤봉보를 살펴보면 척계광의 {기효신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면서 하나의 교전보를 이루고 있어 수련을 위주로 하는 편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나무를 방망이 모양으로 깍은 날의 면수를 붙여서 만든 육방곤(六方棍) 즉, 육모방망이로 부르는 곤봉류는 조선시대 일반 순라군과 나졸들의 일상적인 호신무기가 되었다.
육모방망이(六方棍)
시대 : 조선 제원 : 길이 38 ~ 55cm 소장 : 전쟁기념관 조선시대의 나졸(羅卒)들이 순찰을 돌 때에 들고 다녔던 곤봉류의 타살무기이다.
철퇴(鐵槌) 철편(鐵鞭)

철퇴와 철편은 일종의 철제 곤봉으로 근접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타살무기의 하나이다. 철퇴는 가격하는 부분에 집중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큰 뭉치를 형성하였다. 투철퇴(投鐵槌)는 약간 떨어진 적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이다. 철퇴 머리부분을 손잡이 끈으로 연결하여 회전시켜 공격하는 무기이다. 그 모양은 원형의 형태에 그 외부에 예리한 뿔 모양을 돌출시켜서 가격시에 충격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철편은 철퇴와 함께 근접전에 유효한 무기이다. 철편의 형태는 철간(鐵簡)과 비슷한 채찍 모양으로 일명 고들개 철편이라고도 한다.
이삼장군 철퇴(李森將軍 鐵槌)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길이 62cm, 무게 1.3kg
소장 : 이재명(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산20-9)
이삼 장군은(1677∼1735)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 하였다. 조선 경종 때에는 포도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조 원년(1725) 어영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어, 함은군에 봉해졌다. 상월면 석종리에 무덤과 영당이 있고, 주곡리에 있는 고택에 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철퇴는 둥근 철구에 자루를 끼웠고, 철구에는 못과 같은 것이 박혀있다.
철편(鐵鞭)
시대 : 조선후기 제원 : 총길이 46㎝이고, 고들개 길이는 9.5㎝ 소장 : 창덕궁 손잡이와 고들개 사이에는 쇠고리로 연결하였고, 또한 은입사(銀入絲)로 완자문을 시문하였으며, 손잡이에는 천아융(天鵝絨)으로 감싸 휴대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자료:http://idealist.egloos.com/53915>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술(弓術)을 중요시하였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전까지 궁시는 가장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였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화약무기가 크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병기로서 궁시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 이유는 화약무기의 보급이 일반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술은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왕조는 사대부의 소양 가운데 하나로 활쏘기를 강조하였다. 활쏘기가 덕(德)을 함양하는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武科)에 있어서도 궁시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궁시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거의 답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용도가 커서 주요 전투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무소뿔을 이용해서 만드는 각궁(角弓)과 통아(筒兒)라는 대롱 속에 넣어 쏘는 자그마한 편전(片箭)은 사정거리가 1,000보에 이르고 철갑을 뚫는다는 위력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병기로 유명하였다.
활은 그 모양과 재질, 용도, 크기, 세기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는데, 대체로 정량궁(正兩弓), 예궁(禮弓), 목궁(木弓), 철궁(鐵弓), 철태궁(鐵胎弓), 각궁(角弓)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각궁이다. 무소뿔, 참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각궁은 그 탄력성이 매우 강하여 같은 크기의 외국의 활이 따르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각궁의 길이는 126㎝였고, 사정거리는 약 2백 보에 달하였다.
화살은 화살촉과 살대, 깃, 오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살대는 대나무, 오늬는 싸리나무로 만들고, 깃은 꿩과 같은 새의 깃털을 썼으며, 화살촉은 주로 쇠로 만들었으나 연습용 화살에는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화살 종류로는 나무로 만든 목전(木箭), 화살촉을 쇠로 만든 철전(鐵箭),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예전(禮箭), 가장 짧은 화살 편전(片箭), 그리고 대우전(大羽箭), 세전(細箭), 유엽전(柳葉箭), 주살, 동개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박두(樸頭), 철전, 유엽전, 편전 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살로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투시 화살을 꽂아 두며 사용하는 화살주머니 시복(矢 ), 얹은 활을 넣어 두는 활집인 궁대(弓袋), 그리고 연습 내지는 수렵시에 사용하며 화살을 보관하거나 휴대할 때 가지고 다니던 전통(箭筒) 등이 있다. 때론 시복과 궁대를 결합한 것을 동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시복만을 동개라 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궁사들의 운치와 멋을 살리기 위해 용무늬, 꽃무늬, 십장생 등 각종 문양을 넣기도 하였고, 재질도 목제, 죽제, 지승제, 지제 등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또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보조도구가 필요로 하는데, 활촉을 바로잡는 데 사용하는 촉돌이개와 시위줄을 당기는 데에는 깍지 등이 그것이다. 그 외도 활을 쏠 때 시위가 팔을 칠 때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썼던 완대(腕帶)라든가 줌통을 잡는 데 쓰는 활장갑 등이 있다. 이러한 보조도구들을 살수건(矢巾)에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 전기 화약무기 1. 장군화통
장군화통은 성종 5년(1474년) 에 반포된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에 등장하는 화기 중에 하나이다. 병기도설에만 나올 뿐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기록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발과정과 성능은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채연석씨 등 관련 학자들은 세종 27년 3월에 완성된 성능개량형 천자화포가 장군화통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성능개량형 천자화포는 사거리가 1300보에 달했는데, 이 성능개량형 천자화포도 장군화통 처럼 대전(大箭) 을 사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완구류를 제외한 일반적인 조선 초기의 총통 중에는 최대급의 총통이므로, 조선 중기 이후의 천자총통과 비교할 수 있는데, 천자총통보다는 작은 총통이다.
전해오는 실물도 없으며, 실전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채연석씨의 복원품이 항공우주연구소와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원
길이 89.51 cm (2척8촌6분5리) 부리 53.11cm, 격목통 11.78cm, 약통 24.62cm
구경 100.9 mm (3촌 2분 3리)
무게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개량형 천자화포는 1300보
발사체 대전(大箭) 1발
개발시기 직접적인 기록은 없음. 개량형 천자화포와 동명이칭일 경우 세종 27년에 개발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없음
복원품 채연석씨가 1993년 최초로 복원.
실전기록 없음
특징 운반 손잡이가 다른 총통과 달리 관환철로 되어 있음. 조선 전기의 총통중 가장 큼
아래 복원품 사진은 항공우주연구소에 소장된 장군화통 복원품 사진인데, 총통 내부에 대전 1발이 장착된 상태이다. 복원품 사진 속에서는 당차 위에 실려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장군화통을 당차 위에서 사용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자료는 없다.
2. 일총통 (一銃筒)
일총통은 병기도설에 등장하는 총통 중에 하나이다. 정확한 개발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세종 실록 30년 기록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관련 학자들은 세종 27년에 완성된 개량형 지자화포가 일총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총통의 경우 차대전이나 중전 1발을 발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개량형 지자화포는 사거리가 800~900보 정도였는데, 이것이 차대전을 발사했을 때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전기록은 없다.
실물 유물 중에 확실하게 일총통으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채연석씨는 1978년 2월10일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저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황자총통이 황자총통이 아니라 일총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원품은 채연석씨가 복원한 것이 행주산성 유물전시관, 항공우주연구소, 전쟁기념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제원
길이:74.76 cm (2척3촌9분3리), 부리 53.86cm, 격목통 10.09cm, 약통 8.62cm
구경:67.2 mm (2촌1분 5리)
무게:41근 8량
사정거리:미상, 개량형 지자화포의 경우 800~900보
발사체:차대전(大箭) 혹은 중전(中箭) 1발
개발시기:세종 30년 기록에 최초로 보임, 개량형 지자화포와동일한 무기일 경우 세종 27년경 완성
근거자료: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확실한 유물은 없음, 경남 저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총통은 현재 해군사관학교 소장(1978.02)
복원품: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항공우주연구소, 전쟁기념관 소장중
아래 일총통의 실물 사진(해군박물관 소장)은 채연석씨 저서를 포함한 국내 10여종의 전통화약무기 관련 서적에 한번도 실린 적이 없는 사진이다. (대부분 복원품 사진만 실려있다) 희귀자료라고 할수야 없겠지만 상당히 구하기 어려운 자료이다. 이 총통의 길이는 64.4cm이고 구경은 60mm로 병기도설의 일총통 제원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총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이총통 (二銃筒, 宇字총통?)
굳이 비유하자면 장군화통과 일총통,삼총통이 대포에 가깝다면 이총통은 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개발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세종 29년의 기록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만약 개량형 현자화포와 동일한 무기일 경우 세종 27년 경에 완성된 것이 된다. 발사체는 소전을 쏠 경우 1발식 사격하지만 세장전이나 차세장전으로 사격할 경우 각각 6발, 9발식 사격한다.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총통명문에 이총통이라고 적힌 총통이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주박물관의 이총통은 병기도설의 이총통과는 조금 다르며, 특히 부리 구멍(총구)이 원형이 아닌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오례서례 총통도(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과 다른 자료임)에는 경주박물관의 이총통과 유사하게 부리 모양이 삼각형으로 된 총통그림이 있다. 실물이 거의 없으므로, 후계무기로 추정되는 사전장총통이 개발된 후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제원
길이 44.99 cm (1척 4촌 4분) 부리 25.71cm, 격목 2.75cm, 약통 9.56cm, 자루구멍 6.97cm
구경 26.2 mm, 8분 4리
무게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개량형 현자화포와 동일한 무기일 경우 700~900보 정도로 추정됨
발사체 소전(1발), 세장전(6발), 차세장전(9발)
개발시기 세종 29년 기록에 최초로 보임, 개량형 현자화포와동일한 무기일 경우 세종 27년경 완성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경주박물관에 1문 소장, 경주박물관 이총통은 부리 구멍이 삼각형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없음
특징 후계 무기인 사전장총통이 개발된 후,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
4. 삼총통 (三銃筒, 宙字총통)
삼총통은 이총통보다 길이와 구경이 작지만 이총통보다 대형의 발사체를 사용한다. 즉, 이총통이 소전,세장전,차세장전 같은 작은 화살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삼총통은 50.14cm에 달하는 차중전을 사용한다. 채연석씨는 병기도설의 삼총통이 세종 27년에 개량된 황자화포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태종~세종대의 황자화포는 중국식 화포를 참고해서 만든 총통인데, 다른 총통과는 달리 세종 27년의 성능개량 전에도 비교적 우수한 성능으로 호평을 받던 총통이었다.
삼총통은 어떤 총통보다 실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71문이 남아있다. 특히,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574번지에서는 한 곳에서 무려 52문에 달하는 삼총통이 발굴된 적도 있다. 남아있는 실물 수량이 엄청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사전총통 다음으로 주력 총통으로 사용된 총통인 것 같다.
제원
길이 33.18 cm, 1척6분2리
구경 16.6 mm, 5분3리
무게 1근 3량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개량형 황자화포와 동일한 무기일 경우 800보
발사체 차중전 1발
개발시기 세종 28년 기록에 최초로 보임, 개량형 황자화포와동일한 무기일 경우 세종 27년경 완성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총 71문, 해군사관학교(2), 경주박물관(4), 진주박물관(52), 경북대(1), 경희대(1), 부산대(1)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없음
특징 조선 전기에 많이 사용한 총통의 하나
5. 팔전총통 (八箭銃筒, 洪字총통)
팔전총통은 길이는 삼총통에 가까우나 구경은 이총통과 유사하다. 즉, 비슷한 크기의 삼총통에 비해서 구경이 큰 편이고, 격목통 길이는 길며, 약통 길이는 짧은 편이다. (약통 길이의 경우 삼총통은 7~8cm 정도인데 반하여 팔전총통은 4~5cm 정도) 삼총통이 대형 화살 1발을 발사하는데 적합하도록 특화되었다면, 팔전총통은 소형 화살 여러 발을 동시 사격하는데 적합하도록 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시에 여러발을 사격하는 대신 사거리는 다소 짧다는 점에서 기관단총에 비유할 수 있다. 팔전총통은 세종 28년(1446년) 1월에 최초로 기록에 보이며, 개발시기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팔전총통은 세종 28년 이전에 그 선행무기체계가 전혀 없다.
실물은 경남 하동에서 2문이 출토되어 진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출토된 팔전총통에는 "八箭銃筒 洪字二樣銃桶 戊辰 八月 泗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채연석씨는 명문의 무진년을 1448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명문 중에 홍자이양(二樣)이란 표현에서 홍자일양(一樣) 양식의 팔전총통도 존재할 수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길이 31.33 cm (1척 3리), 부리 16.15cm, 격목통 3.37cm, 약통 4.62cm, 자루구멍 7.19cm
구경 29.4 mm,
무게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복원품의 경우 97.2m~117.9m
발사체 세전 8발, 차세전 12발
개발시기 세종 28년(1446년) 1월 기록에 최초로 보임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총 2문, 경남 하동에서 2문 발견, 진주박물관 소장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전쟁기념관, 경희대 박물관 소장중
실전기록
특징
기타
아래 사진은 경희대 박물관에 전시중인 팔전총통 복원품이다. 단순히 총통만 복원한 것이 아니라, 뒷부분의 나무 자루까지 완전히 복원했다. 도록상에는 복원품 제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채연석씨는 경희대 물리학과 출신이므로, 이 복원품도 채연석씨의 복원품으로 생각된다.
6. 사전총통 (四箭銃筒, 荒字총통)
사전총통은 팔전총통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조금 더 소형의 총통이다. 화차(火車)의 총통기에 설치되는 총통도 바로 이 사전총통이다. 조선 전기의 각종 화약무기 훈련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 주력 총통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상 사전총통은 실록 세종 28년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채연석씨는 세종대에 쌍전화포 ->사전화포 ->가자화포 -> 개량형 가자화포 -> 사전총통 순으로 발전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쌍전화포와 사전화포의 경우 명칭에서 2발,4발 식을 동시에 사격하는 화포임을 추정할 수 있고, 가자화포의 가자(架子)는 틀이나 받침을 의미하므로 이는 의미상 화차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이들이 모두 사전총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전총통의 사거리는 분명하지 않으나 만약 개량형 가자화포가 사전총통의 전신(前身)이 맞다면, 개량형 가자화포의 사거리를 토대로 사전총통의 사거리를 유추할 수 있다. 개량형 가자화포는 1발 사격시 600보, 4발 사격시 400보 정도였다. 복원품의 경우 이런 기록에 훨씬에 못미치는 120~180m 정도만 날아갔다. (1981년 채연석씨 실험결과)
실물은 10문이 남아있다. 하동에서 발견된 3문의 사전총통은 진주박물관에 보관중이며 건국대,서울대 박물관도 각 1문을, 동아대박물관은 2문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역수군사'라는 책으로 유명한 구 일본 해군대좌 아리마 세호(有馬成甫)도 1문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대 소장품의 경우 명문에 '荒字'라고 적혀 있다.
길이 26.3 cm (8촌 4분 2리), 부리 12.21cm, 격목통 2.31cm, 약통 4.84cm, 자루구멍 6.94cm
구경 21.9 mm
무게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복원품의 경우 124m~182.5m, 개량형 가자화포의 경우 4발 사격시 400보
발사체 세전 4발, 차세전 6발
개발시기 세종 28년(1446년) 1월 기록에 최초로 보임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총 10문, (육군박물관 2, 진주박물관 2, 동아대 2, 서울대 1, 건국대 1, 아미라 세호 1)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특징 조선 전기의 주력 총통
기타
아래 사진은 사전총통 실물로 육군박물관 소장품이다.
7. 사전장총통 (四箭長銃筒, 日字총통)
사전장총통은 이름만으로 보면 사전총통을 길게 만든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태면에서 사전장총통은 오히려 이총통과 유사하다. 사전장총통과 이총통을 비교하면 사전장총통이 이총통보다 조금 작을뿐 전반적인 규격이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총통의 경우 소전 1발, 세장전 6발, 차세장전 9발을 사격하며, 사전장총통의 경우 차소전 1발, 세장전 4발, 차세장전 6발을 사격한다. 규격 기준 상 사전장총통의 구경이 이총통보다 조금 작아서 화살 수를 적게 장전 할뿐 발사체도 거의 동일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전장총통은 오히려 이총통을 개조한 무기라고 생각된다. 개발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12월조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길이 43.05 cm (1척3촌7분8리), 부리 25.59cm, 격목통 2.31cm, 약통 8.12cm, 자루구멍 7.03cm
구경 24.1 mm
무게 2근 10량
화약용량
사정거리 미상
발사체 차소전 1발, 세장전 4발, 차세장전 6발
개발시기 세종 30년(1448년) 12월 기록에 최초로 보임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1문, 경희대 박물관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현재 행주산성유물전시관,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특징
기타
아래 사진은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사전장총통이다. 현재 국내에 사전장총통 실물은 1점만 전해오고 있고, 경희대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따라서,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이 사전장총통은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경희대 박물관은 희귀한 고총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1967년 이래 경기도 용인 지역 일대에서 모 도굴단 일당들이 금속탐지기 까지 동원하여 고총통을 다수 발굴한 적이 있다. 이 도굴단 일당들이 도굴한 것을 골동품 판매상인 박고당(博古堂)이 구입하였고, 박고당에서 수집한 고총통을 경희대 박물관이 다시 구입한 것이다. 타 대학 박물관 소장품은 조선 후기의 전래품을 구입한 것이 많으나, 경희대 박물관 소장품은 땅에서 파낸 조선 전기의 출토품이 많다. 이 때문에 경희대 박물관 소장 총통들은 상대적으로 오래되고 희귀한 종류들이 많은 편이다.
8. 세총통 (細銃筒, 月字총통)
세총통은 조선조 시대의 각종 총통 중에서 가장 소형이다. 다른 총통과는 달리 자루를 끼워서 드는 것이 아니라, 철흠자(쇠집게)로 들고 사격을 한다. 어떤 점에서는 권총을 연상시키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발사체는 차세전 1발이다.
실록 세종 27년의 기록에는 세화포로 나오는데 세총통의 동명이칭으로 생각된다. 세종 27년의 성능 개량 이전에는 사거리가 200보를 넘기지 못했으나, 성능개량 후에는 500보까지 사격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형 총통이므로 '아녀자들도 사격할 수 있는 총통'으로 평가되기도 했으며, 말위에서도 쉽게 휴대 할 수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길이 14.0 cm, 부리 8.0cm, 격목통 1.0cm, 약통 4.69cm, 족 0.31cm
구경 8.4 mm
화약용량
사정거리 개량전 200보 미만, 개량후 500보
발사체 차세전 1발
개발시기 세종19년 6월 기록에 최초로 보임, 세종 27년 기록의 세화포는 세총통의 동명이칭으로 추정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1정, 육군사관학교에서 소장중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특징 철흠자에 고정시켜 사격, 가장 작은 총통으로 아녀자도 사용 가능
기타 거칠게 비유한다면 권총에 해당
아래 사진은 세총통 실제 유물과 복원품 사진이다. 실물은 육군박물관 소장품으로 박호병씨가 기증한 것이다. 아래 복원품은 경희대 박물관 소장품이다. 복원품 세총통은 철흠자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다.
9. 총통완구(銃筒碗口)
조선 초기의 각종 총통이 원칙적으로 화살을 주로 사용한데 반하여 총통완구는 처음부터 석환(石丸)을 사용했다. 또한, 전체적인 구조에서 길이가 짧은데 반하여 구경이 두드러지게 크다는 점에서 다른 총통과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이런 형태의 화기를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완구(碗口) 라고 불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 중에 육화석포(六火石砲)가 이런 완구의 일종으로 생각되고 있다. 기록상 최초로 완구가 보이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기시조의 화약고기(火藥庫記)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태종 14년 6월경 최해산(최무선의 아들)이 중국제 완구를 참조하여 대,중,소 완구 3종류를 개발했다고 한다. 세종 원년 8월에는 대마도를 통해 중국제 수철제 완구를 입수하여 완구 제작에 참조한 바 있다. 세종 19년에는 너무 큰 대완구보다는 작고 소완구보다는 큰 중완구를 기본으로 하여 이동이 간편한 새로운 완구를 개발했다. 채연석씨는 병기도설의 총통완구는 바로 이 세종 19년의 개량형 완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기도설의 총통완구의 가장 큰 특징은 2개의 부품으로 분해,조립이 가능하다는데 있으므로, 세종 19년의 기록과 일치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물이 한점 발견된 적이 있으나, 귀선별황자총통을 위조한 자의 또다른 조작품으로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실물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채연석씨의 복원품만 몇군데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길이 61.8cm
구경 335.3mm
화약용량
사정거리
발사체
개발시기 세종 19년으로 추정됨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미공개된 1점이 있으나 위조품으로 의심받고 있음.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항공우주연구소, 전쟁기념관 소장중
실전기록
특징 공성용 화포로 사용, 2개 부품으로 분해/조립 가능
기타
10. 철신포 (鐵信砲)
철신포는 신호용 기구로 사용하는 화포로 실탄을 발사하지는 않는다. 철신포는 일반적인 총통과는 달리 격목통의 아래부분 지름이 약통 윗부분 지름보다 작다. 채연석씨는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이렇게 설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약통에서 폭팔한 연소가스가 격목통과 부리를 통과해 바깥으로 방출하게 되므로, 격목통의 좁은 부분은 일종의 노즐 역할을 하게되어, 소리가 커지게 된다고 한다.
최무선의 기록에 이미 신포(信砲)가 보이며, 세종 10년, 세종 14년, 18년, 19년, 21, 22, 24, 29년에도 신포의 실제 사용과 관련된 기록이 계속나타나고 있다. 세종 10년경에 전국 각지에 신포를 배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봉수제도 못지않게 신포(信砲)를 이용한 신호체계도 매우 중시했던 것 같다.이러한, 신포를 설치한 곳을 신포소(信砲所)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신포는 국경 지역에서 인접 지역으로 신호를 전달하는데 많이 사용했는데, 압록강~두만강 국경 지역 백성들에게 여진족의 침입을 경고할때 경보신호(철신포 2회 발사하면 여진족의 침입을 의미)로 활용한 경우도 많았다.
철신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문종 즉위년의 기록에 최초로 보이지만, 주철신포란 표현은 세종 24년의 기록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길이 40.86cm
구경 100.9mm
화약용량
사정거리 -
발사체 -
개발시기 최무선~세종 24년 이전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없음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실전기록 세종 19년, 여년~조명간 국경지대 침입사건
특징 실탄이 발사되지 않는 신호용 기구
기타 인접부대 연락, 백성들에 대한 적침 경보용으로 활용
11. 신제총통 (新制銃筒, 盈字총통)
조선 초기의 화약무기 대부분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신제총통은 세조대에 만들언 총통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초로 기록에 보이는 것은 세조 13년 7월의 기록이다.
신제총통은 크기면에서 사전총통보다는 작고 세총통보다는 크다. 세총통은 나무자루를 삽입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철흠자를 사용해서 고정하는데 반하여, 이 신제총통은 사전총통과 마찬가지로 나무자루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실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많이 사용했던 총통으로 생각된다.
길이 19.69cm(6촌 3분), 부리 8.75cm, 격목통 1.56cm, 약통 4.69cm
구경 13.4mm
화약용량
사정거리
발사체 신제총통전 1발
개발시기 세조 13년?
근거자료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 중에 도면과 규격이 남아있음
실물 15문, 육사(10), 고려대 (4), 경희대 박물관(1)
복원품 채연석씨가 복원
실전기록
특징
기타
<자료:http://hackjaponaise.cosm.co.jp/archives/websites/etica13/g-3-2-3.htm>
거북선(龜船)
거북선[龜船]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으로서,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다.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내용으로 보아 귀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이미 고려말 또는 조선초부터 거북선이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거북선이 개량, 실용화되었다.
맹선(猛船)
조선 전기 군선의 일종. 조운(漕運)에도 겸용할 수 있게 한 겸용선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선(大船) . 중대선(中大船) . 중선(中船) . 쾌선(快船) . 맹선(孟船) . 별선(別船) . 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 . 추왜별선(追倭別船) 등 여러 종류의 군선들이 증강되어 있었으나, 이들 군선이 일정한 제원 없이 건조되어 군선으로서 쓸모가 없었으므로 1461년(세조 7) 10월 신숙주(申叔舟)가 각지의 군선을 개량하여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여 1465년에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된 것이 맹선의 전신이 되었다.
병조선은 세조대에 개발되어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하여 대 . 중 . 소맹선으로 개명되어 그뒤 1세기 동안 조운과 전공(戰攻)에 겸하여 사용되었다. 왜구가 완전 진압된 평화시에 있어서 군선의 평화적 이용 때문에 탄생한 병조선은 맹선제도로 발전하였고, {경국대전}에서의 맹선에 대한 제반 규제는 수군(水軍)의 군비감축이라는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국대전}의 군선 및 선군(船軍)의 수를 비교해보면, 군선이 829척에서 739척으로 줄었고, 선군이 5만177인에서 4만8800인으로 감축되었다. 더욱이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조선 829척 중 무군선(無軍船)이 57척뿐인데 {경국대전}에는 737척의 군선 중 249척의 무군선이 기록되어 있어 세조대에 군용선척의 감축이 있고 오히려 조운의 사용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맹선은 제작 후 군용보다는 조운에 보다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맹선은 군선으로서는 너무 둔중하여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대에 이미 거론되었고, 중종과 명종대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삼포왜란 . 사량왜변 . 을묘왜변 등의 변란에서도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1555년(명종 10)에 대형군선인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고, 이어서 종형군선인 방패선(防牌船)이 등장한 이후로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임진왜란과 그 뒤의 시기에도 군사적 활동을 찾아볼 수 없고 간혹 기록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구실은 비군사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맹선은 중종대에 군선으로서의 명맥을 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종류의 배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맹선이라는 군선이름이 없어졌을 뿐, 그 구조와 선체의 모양은 일반 조운선으로 계승되어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게 되고, 명종대에 개발된 혁신적인 군선인 판옥선이나 이순신(李舜臣)의 거북선[龜船]도 그 하체구조는 맹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맹선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한선(韓船) 구조의 배로서 고려시대의 조운선인 초마선(哨馬船) 및 조선 후기의 조선(漕船)과 동일한 계통의 배이므로 그 구조와 선형은 우리나라 재래의 전통적인 평저구조(平底構造)를 보이고 있다. 즉, 넓고 평탄한 저판(底板)을 밑에 놓고, 그 좌우 현측(舷側)에 외판(外板)을 세워 붙였으며, 선수(船首)에는 비우라고 하는 평면선수재(平面船首材), 선미(船尾)에는 평면으로 된 선미재(船尾材)를 세워서 선체를 꾸며놓았다. 그리고 맹선이 군용으로 쓰여질 때에는 노역(櫓役)을 한 것으로서 양현에 적당한 수의 노(櫓)가 설치되고, 병사들이 타고 전투에 임할 갑판(甲板)을 깔아놓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선에는 대맹선 . 중맹선 . 소맹선의 세 종류가 있어 전국 수군기지에 배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대맹선의 규모는 군사 80인이 탑승할 수 있을 정도였고, 조운선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800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는 정도였다. 조선 전기 전국의 진포(鎭浦)에 배치된 대맹선의 수는 80척이었으며, 각종 맹선 중에서도 대맹선은 애당초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에도 겸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겸용선이어서 갑판 위의 상장(上粧)을 되도록 간편하게 꾸며 놓았다. 중맹선의 규모는 군사 60인 정원으로 전국 진포에 배치된 수는 192척이고, 소맹선의 규모는 군사 30인 정원으로 전국 진포에 배치된 수는 216척이다. 대맹선이 주로 조운 겸용의 병조선이라서 성종대부터 판옥선이 등장한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조운선으로 사용된 데 비하여, 소맹선이 오히려 군선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두석린갑주(豆錫鱗甲胄)
두석이란 놋쇠로서, 두석린갑주는 두석의 미늘을 연결하여 만든 갑옷으로 우리나라에 전존(傳存)하는 것은 원수용(元帥用)의 두 점뿐이다. 이는 고려대학교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갑옷의 특징은 합임식의 포형(袍形)으로 양옆의 배래기가 완전히 트였으며, 후면에는 등솔로 허리부분 이하가 트였는데, 트임부분에는 모두 털을 둘렀다. 재질은 겉감이 홍모(紅氈)을 사용하였고 속은 무명을 안감은 명주를 대었다. 황.적.흑색의 두석린은 소매의 상박부분과 복부까지만 첨부하였고 나머지 부분에는 두정을 박았으며 길상 문양을 놋쇠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한편 투구는 흑색 피혁으로 사주(四注)에는 놋쇠로 융기쌍조(隆起雙條)를 이루고 있다. 전후에는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을 새겼다. 정개에는 삼지창을 위시하여 보주 . 주락에 이어 한주가 개철에서 마무리짓고 전비는 역시 놋쇠로 반월형이나 앞에는 칠능(七稜)이고 안에는 용을 투조하였고 전비 밑으로 이마가리개를 만들어 정중에 원수(元帥)를 표시하였으며, 목가리개는 좌우와 후면으로 드리웠다.
면갑(綿甲)
면갑은 열세겹의 면을 누벼 만든 갑옷으로 고종초 병인양요(1886) 이후 대원군은 김기두(金箕斗)와 안윤(安潤)으로 하여금 면제배갑(綿製背甲)을 만들게 한 바 있다. 즉 세면(細綿)을 몇겹 누벼 소총탄을 발사 실험한 결과 열두겹이면 총탄이 관통치 못하므로 드디어 열세겹으로 제작하였던 사실이 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한 벌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갑옷은 무명을 30장 겹쳐서 만든 것으로 도저히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실전에 있어서 과연 착용이 가능하였는지 의문이다. 이 갑옷의 형태는 총길이 85mm로 반령깃에 양겨드랑이 부분은 깊이 파서 활동하기 편하게 했으며 또한 어깨의 좌측이 터져 있어 매듭단추가 달림으로써 입고 벗게 되어있고 양쪽옆의 트임에는 좌우에 2개씩 각각 앞뒷판으로 끈이 부착되어 매게 되어있다. 또한 깃과 모든 테두리에는 같은 천으로 바이어스 처리를 곱게 하였으며 앞판의 좌우로 2개, 뒷판에 상하, 좌우로 2개씩 문양을 넣었는데 검은색으로써 도장을 찍거나 그려넣은 것처럼 보인다
중완구(中碗口)
조선시대에 사용된 유통식 화포.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화포
크기 : 전체 길이 64.5 cm, 통신(筒身) 길이 20.5 cm, 약통 길이 23.5 cm, 포구 지름 23.5 cm
소장 : 국립진주박물관
이 중완구는 1985년 12월 15일 경남 하동군 옥종면 동화리 산 57번지에서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유물이다. 중완구는 조선 초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유통식 화포의 하나인데 일명 댕구라고도 하지만 최초에는 화통완구 또는 총통완구라고도 한 유통식(有筒式: 총구에서 화약과 발사물을 장진함) 화기의 일종이다. 완구는 이미 조선 태종 때 창제되어 세종초에는 수철화통완구(水鐵火筒碗口)가 전국적으로 보급 되었다. 그 종류로는 별대완구·대완구·중완구·소완구·소소완구 등으로 구분되며, 발사물로는 돌로 만든 단석(團石)과 선조 때 이장손이 창제한 작열탄인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다. 이 유물은 1590년(선조 23)에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며 총 길이는 64.5cm, 통신(筒身)길이 20.5cm, 약실길이 23.5cm, 포구지름 23.5cm로서 포구에는 변대(邊帶)를 두르고 그 통신 둘림이 점차 좁아지면서 약실과 연결된다. 이어 계선(界線)을 이루는 대선(帶線)을 두르고 또 손잡이가 9.0cm 정도로 반월형을 이루며 첨부되었다. 이어 약실은 약간 도톰하게 수평을 유지하다가 포미(砲尾)에서 둥글려 마무리하여 놓았다. 약실의 표면에는 음각으로 “萬曆八十年九月 日營 鑄成震天雷 萬里重八十五斤高州浦匠 李勿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로 보아 이 완구는 1590년 9월에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화포장 이물금이 주조한 것으로 경상남도 하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는 임진왜란 당시 패주 하는 왜구를 추격하던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기로 생각되는데, 이 중완구는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면 1리를 갈 수 있고, 무게는 85근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완구는 거의 완형이며, 약실의 명문으로 인해 제작연대 및 제작자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우리 나라 화약무기발달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물이다.<자료:국립중앙박물관>
대완구 大碗口
조선 후기에 사용된 불씨를 손으로 선혈(線穴)에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 청동제 화기.
지정연도 : 1986년
시대 : 조선 후기
크기 : 전체길이 64.4cm 통신길이 33.3cm 약실길이 31.1cm 구경 26.3cm. 외경 37.5cm
종류 : 화기
대완구는 유통식 화기(有筒式火器)의 일종으로 총통 완구라고도 불린다. 이미 조선시대 태종(太宗) 때 만들어졌고, 세종 1418년에는 이예(李藝)가 재래의 청동제 완구를 개량하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성종 5년, 즉 1474년 군례조(軍禮條)의 기록에 의하면, '포(砲)는 돌을 사용하여 만들고, 완(椀)은 포석(砲石)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바닥이 없고 구리로 만든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현재 육군 박물관에 대여·전시중에 있는 이 대완구는 약실(藥室) 표면에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헌종 11년 1845년 8월에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수철장(水鐵匠), 현자(玄字)와 황자(黃字) 총통에 이르기까지 명시하고 있다. 이 완구는 주조 기법이 수려할 뿐 아니라 결실된 곳이 없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화포사 연구에서는 물론 국방 과학 기술을 밝히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자료: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자료:http://www.science.go.kr/>
조선 중기에 사용되었던 화기(火器).
지정번호 : 보물 제860호
지정연도 : 1986년 3월 14일
소장 : 궁중유물전시관
소재지 : 서울 중구 정동 5-1
시대 : 조선 중기
크기 : 지름 21cm 둘레 68cm, 죽통(竹筒) 구경 5.2cm, 개철(蓋鐵) 구경 7.6×8.4cm, 화약혈(火藥穴) 구경 6.2cm
분류 : 무구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하여 대완구(大碗口)라는 중화기로 쏜 포탄으로, 임진왜란 때 공성화기(攻城火器)로서 위력을 발휘했다. 위 아래는 둥글고, 허리는 퍼진 모양이며, 위 한가운데는 뚜껑인 개철을 덮을 수 있도록 방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신관(信管)과 같은 발화장치인 죽통을 넣을 수 있도록 구경 5.5cm 정도의 구멍이 있다. 허리에는 화약을 넣고 격목(檄木:뇌관)을 박는화약혈이 있다.
발화장치인 죽통 속에는 도화선인 약선(藥線)을 감는 나선형의 목곡(木谷)이 들어가는데, 빨리 폭발시키려면(근거리 발사) 10곡(曲), 늦게 폭발시키려면(원거리 발사) 15곡으로 약선을 감아서 죽통에 넣는다. 이와 같이 해서 만들어진 죽통을 빙철(憑鐵)과 함께 진천뢰 속에 넣고, 죽통의 도화선 끝을 개철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빼내어 발사할 때 불을 당기도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왜병에게 쫓겨 경북 안강(安康)으로 진을 옮긴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晋)이 경주싸움 때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을 선봉으로 하여 비격진천뢰를 써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해군의 함포(艦砲)에도 이를 이용하여 많은 적의 함선을 부수었다. 이 화기는 현존하는 같은 종류의 유물 중, 공정과정이 가장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국방과학기술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by 약초마을 | 2008/11/19 20:34 | 군사관련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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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빨간글씨 at 2010/11/08 15:25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공유 목적으로 원본 출처 명시 조건으로 다음 아고라 군무방에 담아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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